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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墓碑)와 탑본(搨本) : 돌에 새기고 종이에 베끼는 문화 새로운 책이나 논문이 있으면 무턱대고 복사하던 시절이 있었다. 저작권이 뭔지도 모르는 시절 읽든 말든 복사부터 해야만 마음이 편했다. 도서관에서 원서를 빌려 읽으며 독서카드에 일일이 베끼고 메모하고 반납하던 시기와 다른 모습이었다. 도서관의 책은 카피를 위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던 시절이 지나고 이젠 종이에 복사하는 것이 부담스럽다. 사람들은 PDF파일로 책과 논문을 저장하고 복사한다. 복사는 현대 문화의 특징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원본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등본도 필요하고, 복사본도 필요하다. 대중들은 카피를 원한다. 인쇄 기술의 발달이 지식의 대중화를 가져왔던 것만큼 복사기의 발명도 지식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복사기가 나오기 이전에는 원래의 모양 그대로 베끼는 것이 신기(神技)에 속했을 것이다... 2019. 8. 18.
후궁의 혼례: 헌종과 경빈 김씨의 혼례 창덕궁의 낙선재에는 석복헌(錫福軒)이란 건물이 있다. ‘복을 내리는 곳’이란 이곳의 주인은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慶嬪 金氏1832-1907)이다. 경빈은 1832년(순조32) 8월 27일 한양 누동(漏洞)의 사저 유연당(悠然堂)에서 태어났다. 헌종의 계비인 효정왕후가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자 1847년(헌종 13) 10월에 빈(嬪)으로 간택되어 입궁(入宮)하였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경빈은 1843년에 있었던 왕비 선발에서 아쉽게 탈락했는데 이때에 헌종이 그녀를 보고 사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왕비 간택단자에 경빈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석복헌을 지어 거처하도록 배려한 헌종의 모습에서 그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헌종이 경빈에게 복이었을까? 경빈이 헌종에게 복이었을까? 왕자의 출생이란.. 2018. 12. 9.
조선시대 태(胎)와 땅, 그리고 돌의 문화 명종대왕 태실(서산시 운산면 태봉리 소재) “태어날 때 자신의 신을 가지고 나온다”고 해야 할까? 국립고궁박물관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공동주최하는 “조선 왕실 아기씨의 탄생”(2018.6.27.~9.2)이란 전시를 준비하면서 느낀 결론이었다. 조선시대 왕의 자녀가 태어나면 아기를 따라 나온 태를 왕실에서 보관했다가 3일째 되는 날 100번씩이나 깨끗이 씻은 후 준비한 항아리에 넣고 봉하였다. 항아리는 크기가 서로 다른 두 개를 준비하는데 작은 항아리 바닥에 중국 동전 한 닢을 놓고 그 위에 태를 놓았다. 입구를 막고 뚜껑을 닫은 후 이를 큰 항아리에 넣고 항아리 사이에 솜을 넣어 고정시킨 다음 뚜껑을 닫고 끈으로 묶었다. 그리고 길한 날을 잡아 태항아리를 길지(吉地)에 묻었다. 이를 태실(胎室)이라 부르고.. 2018. 9. 8.
조선시대 국왕의 죽음과 상장례 (이욱, 민속원, 2017) 죽음은 보편적이지만 죽음을 감내하고 다루는 방식은 시대와 문화마다 다르다. 그 다름이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괴이하게 여겨질 때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일 될 수도 있다. 조선시대 상례는 한국인에게 익숙하지만 이를 ‘허례허식’이란 딱지를 떼고 보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붕당(朋黨)의 빌미가 되었던 국상의 경우엔 그에 대한 멍에가 더 무거웠다. 조선시대 사족(士族)과 붕당 정치에 대한 이해가 바뀌면서 상례에 대한 평가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국장을 복제(服制)를 둘러싼 논쟁에서 벗어나 전체 의례와 상징 등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왕실문화’ 연구의 발전 덕분이었다. 조선 왕실의 의례 기록인 의궤(儀軌)에 대한 관심은 의례에 관심으.. 2018. 3.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