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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혼례

후궁의 혼례: 헌종과 경빈 김씨의 혼례

by 갈뫼길 2018. 12. 9.

창덕궁의 낙선재에는 석복헌(錫福軒)이란 건물이 있다. ‘복을 내리는 곳이란 이곳의 주인은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慶嬪 金氏1832-1907)이다. 경빈은 1832(순조32) 827일 한양 누동(漏洞)의 사저 유연당(悠然堂)에서 태어났다. 헌종의 계비인 효정왕후가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자 1847(헌종 13) 10월에 빈()으로 간택되어 입궁(入宮)하였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경빈은 1843년에 있었던 왕비 선발에서 아쉽게 탈락했는데 이때에 헌종이 그녀를 보고 사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왕비 간택단자에 경빈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석복헌을 지어 거처하도록 배려한 헌종의 모습에서 그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헌종이 경빈에게 복이었을까? 경빈이 헌종에게 복이었을까? 왕자의 출생이란 큰 복을 기대했을 것이다. 이렇게 사랑으로 맺어진 헌종과 경빈의 만남은 왕실의 대표적 사랑 이야기 중 하나로 전해진다.

왕과 후궁의 사랑은 궁궐 내 흥미로운 이야기 소재이다. 단순한 로맨스를 떠나 암투와 모략이 결합되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조선시대 역대 왕들 중에서 현종, 경종을 제외하면 모두가 후궁을 두었다. 1명으로부터 19명까지 숫자는 차이가 나지만 후궁은 당연시되는 존재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후궁은 내명부(內命婦)의 정1품부터 종 4품까지 품계를 받는 공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왕과 후궁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들도 부부의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후궁의 지위는 불완전한 자리였다. 이러한 불완전한 지위는 왕비와 후궁의 불평등 관계에서 비롯한 것이다. 왕과의 육체적 관계나 사랑의 정도와 무관하게 후궁은 왕의 부인으로 행세할 수 없는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처첩제는 일부다처제가 아니다. 한 남자의 처는 1명일뿐이며 나머지는 첩일 따름이다. 처와 첩의 불평등한 구분은 당사자들에 한정되지 않고 자식까지 이어져 적자(嫡子)와 서자(庶子)의 구별을 낳았다. 그러므로 처첩제는 남녀의 불평등을 넘어 여자와 여자, 남자와 남자를 차별하는 사회 제도 중 하나였다. 왕비와 후궁의 구별 역시 이러한 처첩의 구별에 기초하였다.

만약 사랑의 정도에 따라 처첩의 서열이 정해지면 어떻게 될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 사랑이지만 또 한편 변하기 쉬운 것이 사랑이라 그에 따라 지위가 부여된다면 사회는 출렁이는 파도 같을 것이다. 그 예를 희빈 장씨(禧嬪張氏, 1659 ~ 1701)를 통해 볼 수 있다. 1689년에 숙종은 당시 왕비였던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 민씨를 물리치고 원자(元子)를 낳은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결말은 좋지 않았다. 왕자의 출산이 반드시 사랑의 결과라고 할 순 없지만 그에 따른 지위의 변동은 왕실을 위험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례 때문에 희빈장씨 이후 숙종은 후궁이 원자를 생산하였더라도 왕비가 되지 못하게 하였다.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綏嬪朴氏, 1770~1822) 순조를 낳았으나 후궁으로 생을 마쳤다. 한번 후궁은 영원한 후궁인 셈이다.

이러한 후궁의 불평등한 지위는 혼례식에도 나타난다. 고대 경전에 의하면 처()는 가문끼리의 합의에 의하여 맺어지고 혼인의 예를 치르고 맞이한 아내인 반면, ()은 일정한 예를 갖추지 않고 같이 사는 여자이다. 여자를 맞이하는 데에 의식을 거쳐 맞이하느냐, 그러한 의식 절차 없이 남녀의 관계를 맺느냐는 것은 처와 첩을 가르는 기준점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을 규정하는 데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조선시대 국가 전례의 기본서인 󰡔국조오례의󰡕󰡔국조속오례의󰡕에 후궁을 위한 혼례는 보이지 않는다. 정조대 편찬된 종합적인 의례서인 󰡔춘관통고(春官通考)󰡕에서도 후궁의 혼례는 찾을 수 없다. 혼인은 혈연적으로 전혀 무관한 남녀가 서로 결합하고 사회적으로 지위를 보장받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혼례는 이러한 결합을 상징물과 상징적 몸짓을 통해서 표상하고 선포하는 의식이다. 이러한 혼례식이 없다는 것은 후궁이 혼인으로 인해 지니는 권리와 의무,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지 못하는 사회적으로 결핍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후궁의 혼례는 전혀 없었을까? 여기에서 경빈김씨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후궁의 혼례 기록으로 가장 완전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경빈김씨가례등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궁녀에서 왕의 눈에 띠어 후궁이 된 경우 외 사대부가에서 간택의 절차를 거쳐 후궁이 된 경우 혼례를 거행하였다는 기록이 단편적으로 전하지만 그 전반적인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경빈가례등록󰡕이 처음이다.

경빈의 혼례는 납채(納采)-납폐(納幣)-선교명(宣敎命)-조현대전(朝見大殿)-동뢰연(同牢宴)-익일조현(翌日朝見)”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절차로 볼 때 후궁의 혼례는 조선시대 일반적인 혼례 절차를 따라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후궁의 혼례는 왕비에 비해 불완전한 혼례식이었다. 후궁의 혼례에는 친영(親迎)이 없다.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기러기를 바치고 신부를 맞이해 신랑집으로 데려오는 친영은 유교 혼례의 대표적인 절차였지만 후궁 혼례에서 보이지 않는다. 후궁은 신랑 없이 가마를 타고 궁궐에 들어와 국왕을 알현하는 조현대전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아울러 혼례의 상징인 기러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혼례의 정점인 동뢰연도 왕비의 것과 다르다. <<경빈가례등록>>에는 동뢰연배설도同牢宴排設圖가 있다. 그 그림에는 이성지합(二姓之合 百祿之源)’이란 글자를 가운데 두고 왕과 경빈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여느 혼례와 비슷한 모양새이다. 그러나 실제 이 둘의 위치를 보면 왕은 북쪽에서 남향을 하고, 빈은 남쪽에서 북향을 한다. 그리고 빈의 일방적인 사배(四拜)만이 있다. 왕과 빈의 자리는 부부의 동등한 자리가 아니라 불평등한 관계를 보여준다.

 

                         <동뢰연배설도> <<경빈김씨가례등록>>(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일반적으로 궁녀들은 입궁한 지 10-15년 정도 지나면 계례(笄禮)를 행하고 혼례를 거행하였다. 이때에 궁녀는 혼인식을 위해 친정으로 가서 새식시처럼 치장하고 다시 입궁하여 신랑 없는 혼인식을 치렀다. 이를 독뢰연(獨牢宴)’이라 부른다. 간택의 과정을 거쳐 입궁하는 숙의에게도 거행되었다. 혼자 북쪽을 향해 절하고 술을 마시는 독뢰연보다 경빈의 동뢰연이 훨씬 나은 것이다. 그러나 후궁은 부부의 예를 온전히 가질 수 없었다.

 

                                 <경빈김씨 교명>(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장서각에는 경빈이 혼례 때 받은 교명(敎命)이 있다. 교명은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 세손 등을 책봉할 때 내리는 훈유문서이다. 옥축(玉軸)으로 만든 두루마리 형태로 홍색, 황색, 남색, 백색, 흑색의 순서로 짠 오색 비단에 필사되어 있다. 왕비의 혼례식에서는 이러한 교명 외 책문(冊文), 보인(寶印), 명복(命服)을 함께 받는다. 그러나 후궁에게는 교명만 주어졌다. 이렇듯 화려하지만 또 한편으로 왕비의 그늘 속에 살아야 했던 것이 후궁의 자리였다. 넓게 보면 조선시대 첩의 자리 역시 다르지 않다. 미혼(未婚)이 죄악처럼 여겨졌던 시기, 그 죄악의 화는 면하였지만 부부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첩은 중간적인 불안정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 불완전한 자리에 몰아놓고 위험한 사람인양 바라본 것이 조선 사회의 한 단면이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공식 블로그, "조선시대 후궁은 행복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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