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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종묘의 공민왕 신당과 수복

by 갈뫼길 2021. 11. 21.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종묘(宗廟)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목조로부터 영왕까지 모두 83위의 신주가 봉안된 이곳은 조선 국가를 표상하는 최대의 제향 공간이다. 조선의 종묘는 건국과 함께 개성에 건립되었다가 한양 천도로 인하여 1395(태조 4)에 현재의 장소에 새로 건립되었다. 조선시대 일반인들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던 금역의 이 성소는 현재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다. 외삼문의 문을 통과하여 곧바로 보이는 신도(神道)를 따라가면 정전(正殿)이 나오고, 그 안을 들어가면 넓은 월대 위에 19칸의 일자형 건물이 단순하면서도 엄숙한 자태로 펼쳐진다. 묘정(廟庭) 앞쪽에는 공신당(功臣堂)과 칠사당(七祀堂)이 있으며, 정전의 뒤편에는 조묘(祧廟)인 영녕전(永寧殿)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어울려져 종묘는 조선의 최고 성소가 되었다.

    이러한 종묘를 논할 때 언급되지 않는 또 다른 사당이 있다. 종묘의 외삼문에서 멀지 않은 망묘루(望廟樓) 뒤편에 있는 이 사당은 담장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사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공민왕(恭愍王)과 노국공주(魯國公主)가 나란히 앉아 있는 영정이 있다. 이 사당의 정식 명칭은 '고려 공민왕 영정 봉안지당(高麗 恭愍王 影幀 奉安之堂)'이지만 일반적으로 신당(神堂)’이라 부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여기에 봉안된 영정은 한양에 새로 종묘를 지을 때 북쪽으로부터 회오리바람을 타고 날아와 묘정에 떨어진 것인데 이에 놀란 군신들이 사당을 지어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신당에서 공민왕 영정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곳의 제향을 주관하였던 사람들이다. 종묘 내 공민왕 사당에 왕이 제향을 지냈을까? 나라에서는 이 제향에 향축과 제물을 내렸을까? 관원이 이곳에 제향을 지내기 위해서 왔을까? 우리는 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종묘지》에서는 이곳의 제향을 '정식(正式)' 제례가 아니고 직원들이 갹출하여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이에 관한 자료를 좀더 찾아보면 역시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종묘일지(宗廟日誌)》와 《대방하기(大房下記)》가 있다. 먼저  종묘일지에서 종묘 신당의 존재와 의례의 수행을 찾아내었다. 이에 의하면 종묘 신당에서는 매년 두 차례씩 치성(致誠)이 있었다. 그리고 현존하는 종묘일지는 신당의 기사가 실린 것과 실리지 않은 것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전자는 종묘의 관원이 아닌 별개의 주체가 작성한 것임을 알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신당의 고사를 기록한 이 일지를 기록한 주체가 신당을 관리했던 자들이라 추정할 수 있다. 한편, 1911년 작성된 대방하기(大房下記)의 회계장부를 통하여 신당에서는 치성 외에도 매달 초1, 3, 15, 그믐날에 고사(告祀)를 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치성과 고사의 지출 비용을 통해 그들의 규모와 준비 과정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신당 관련 내용이 일제강점기 자료에서 나온 것이지만 1911년의 시기를 염두에 두면 그 이전부터 종묘 내 신당의 존재를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1892(신정왕후)부묘도감의궤)를 통해 조선시대 종묘 내 신당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대방하기를 작성한 주체가 종묘 수복이었음을 종묘 직원의 명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들이 자체의 규약을 가지고 대방(大房)을 운영하였음을 방헌(房憲)을 통해서 볼 수 있다. 결국, 수복은 대방의 조직을 결성하여 종묘 제향 등의 공적인 업무와 치성과 같은 사적인 업무를 수행하였다. 수복의 공적인 일은 종묘의 수호와 물품의 관리, 제향의 준비와 제물의 진설, 제향의 보조와 정리 등이었다. 이러한 공적인 일과 무관하게 수복은 신당의 치성과 고사로써 그들의 결속을 다졌다.

   종묘 신당은 중앙과 지방 관아에 딸린 부군당의 신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시대 관아의 부속시설인 부군당은 아전(衙前)에 의해서 운영되었으며 그들의 통합과 정체성을 확인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부군당은 관리와 아전으로 이원화된 조선시대 행정 조직과 신분구조를 반영한 신앙 공간이었다. 종묘의 신당 역시 이러한 이원화의 산물이었다. 조선시대 종묘 관리와 제향 전반에 중요한 일을 맡았던 수복이지만 그들은 종묘의 제관이나 집사자로 참여할 수 없었다. 대신 그들은 공민왕 신당을 통해서 그들의 바램을 기원하고 공동체 의식을 강화했다

 

이욱, <종묘의 공민왕 신당과 수복 연구: 일제강점기  《종묘일지(宗廟日誌)》와 《대방하기(大房下記)》를 중심으로>,  《종교문화비평》 4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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