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宗廟)에 들어서면 당신은 무엇을 봅니까? 종묘의 넓은 뜰에 들어서면 좌우로 길게 뻗은 일자형 건물에 시선이 멈춥니다. 상하 이중의 높은 월대 위에 좌우로 길게 펼쳐진 건물은 단순하면서도 절제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붉은색 열주(列柱)가 이어지고 그 위로 기왓골이 검은 빛을 띠며 빗살처럼 길게 이어지는 정전은 엄숙함을 중시하는 신도(神道)의 미학을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종묘를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을 잘 보여주는 성소(聖所)로 칭송합니다.
《서경》에는 “오호라! 칠세七世의 종묘에 덕을 볼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천자는 7대, 제후는 5대까지의 선왕을 종묘에 모십니다. 그 대수가 지나면 사당을 훼철하고 그 신위를 조묘(祧廟)로 옮깁니다. 그러나 대수가 지나도 종묘에서 계속 제사를 받는 선왕이 있습니다. 이를 불천지위 또는 세실世室이라 합니다. 이것은 그의 공덕이 위대하여 영원토록 제사를 받을 가치가 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묘의 신(神)이란 공덕의 신격화입니다. 이곳 종묘의 건물이 애초 7칸에서 19칸으로 3배 가까이 늘어난 것은 이 세실의 증가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묘 미학의 동력은 ‘공덕의 공간화’에 있습니다. 선왕을 세실로 만들고자 했던 욕망이 만들어낸 미학입니다. 종묘가 조선시대 정치이념이자 종교이념이었던 공덕을 보여주고, 현재의 정의를 실현하는 데에 영감을 주는 곳이면 좋을 것입니다.
저는 종묘에서 미美나 종교적 심성, 또는 공덕을 찾을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대신 그곳에서 거행된 ‘의례’를 ‘상상’합니다. 성스러운 감흥을 일으키는 긴 건물, 공덕을 보여주는 19칸의 세실, 이 모든 것이 의례의 현장에선 ‘시간’으로 변합니다. 세실 1칸이 증가하면 제향에서 시간은 30분 이상이 늘어납니다. 조선시대에 종묘제향은 1명의 헌관이 제1실부터 제19실까지 잔을 다 올려야 했습니다. 3명의 헌관이 19칸 하나하나에 들어가 무릎 꿇고 잔을 올리고 나온다면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요? 왕비에게도 잔을 올려야 하지요. 희생의 고기도 올려야지요. 자시(子時)에 시작한 제향은 동 틀 때 끝나지 않겠습니까? 5, 6시간을 훌쩍 넘어버리는 의례의 시간, 이 시간을 바라보는 신하들의 눈에 공덕이 보이고, 공경한 마음이 일어날까? 공덕의 증대가 의례 속에서 시간으로 치환되면서 ‘공경’의 밀도가 해체됩니다.
여기에서 갈등과 변화가 생겨납니다. 자기 조상에게 공경함을 표하기를 바라는 국왕과 몸을 비틀고 짝다리 짚으며 저항하는 관리들 사이에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갈등인거죠. 변화는 그 갈등 속에서 생겨납니다. 한쪽으론 통제와 감시의 기술이 증가하고, 한쪽으론 의례의 간소화가 생겨납니다. 이 모든 것을 공경의 기술(technique)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속화도 조금씩 자라납니다. 한결같이 성스러운 대상은 없습니다. 한국인의 종교심은 타고난 것도 아닙니다. 이념과 경험, 그리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늘 변하는 변덕쟁이입니다. 종묘가 우리에게 주는 영감 역시 영원한 왕조가 없듯이 영원한 성스러움도 없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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