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종묘(宗廟)의 정전(正殿)에 들어서면 좌우로 길게 뻗은 일자형 건물에 시선이 멈춘다. 상하 이중의 높은 월대 위에 좌우로 길게 펼쳐진 건물이 보여주는 단순하면서도 절제된 형식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한다. 붉은색 열주(列柱)가 이어지고 그 위로 기왓골이 엷은 검은 빛을 띠면서 빗살처럼 길게 이어지는 정전은 엄숙함을 중시하는 신도(神道)의 미학을 보여준다.
종묘 정전이 지닌 ‘엄숙함’은 조선왕조 500년의 긴 역사가 빚어낸 건축의 미학이다. 지금 보는 종묘의 모습은 일시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의 증축(增築)을 통해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 건립되었을 때 7실에 불과하던 종묘 신실은 명종대 11실로, 다시 영조대 15실로, 그리고 헌종대 19실로 늘어났다. 좌우로 7칸일 때의 종묘와 14칸일 때의 종묘, 더 나아가 19칸일 때의 종묘가 보여주는 장중함에는 차이가 나지 않을 수 없다.
<정조대 종묘 정전의 세실>
실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신주 태조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종 진종 오묘 세실 1세 1세 1세 1세
조선시대 종묘의 신실은 계속 늘어났다. 이것은 세실(世室)의 증가 때문이다. 세실은 제한된 대수의 범위를 넘어 대대로 제사를 받는 대상을 가리킨다. 이러한 세실의 신주를 ‘조묘(祧廟)로 옮겨내지 않는 신주’라는 의미로 불천지위(不遷之位)라고도 하였다. 대수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신주를 옮기지 않는 것은 그의 공덕(功德) 때문이다. 즉, 그가 생전에 이룩한 공덕이 일반 군주보다 크기 때문에 세세토록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주는 것이다.
세실의 증가는 건축적으로 볼 때 단순하면서도 엄숙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실의 증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신실이란 공간의 증가는 의례 상황에서 시간의 증대로 전환된다. 그리고 계속된 시간의 연장은 제향에 참여하는 헌관과 집사자, 참관자들 모두를 해이하고 지루하게 만든다. 조선후기에 이미 종묘 제향을 거행하는 데에는 6시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새벽부터 동틀 때까지 거행하는 중노동인 셈이다. 시간이 길면 공경한 마음도 느슨해 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조선후기 종묘 제향의 개혁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제향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었다.
<정조대 새로 만든 생갑>
제향의 여러 절차 중에서 신실(神室)의 증가에 영향을 받는 것은 진찬(進饌)과 작헌(獻爵)이었다. 이 두 절차는 의식을 맡은 천조관(薦俎官)이나 헌관(獻官)이 각 신실마다 빠짐없이 돌아가며 동일한 의식을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지겹기도 한 일이었다. 정조는 이러한 시간을 줄이기 위해 보조자를 늘이고, 제기(祭器)를 변경하고, 집사자들의 동선을 줄였다. 진찬의 경우 이전에는 우생(牛牲), 양생(羊牲), 시생(豕牲)의 삶은 고기를 각각 올렸는데 정조는 세 고기를 하나의 생갑에 담아 한 번에 올리는 방식으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천조관이 신실을 이동할 때의 동선(動線)을 최소화하였다.
<헌관의 동선 변화>
헌작에서도 준소와 제상 사이에 오고가는 시간을 줄여나갔으며 순조대에는 진찬과 마찬가지로 신실간 이동을 할 때 지게문 밖으로 나오지 않고 내부에서 곧바로 옮기도록 하였다. 한편, 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두 번째 방법은 참여자에 대한 통제였다. 정조는 재관들로 하여금 추창(趨蹌)의 예법을 강조하고, 축문을 읽는 대축을 차정하는 데에 연로하여 시력이 나쁜 사람을 배제하였다. 그리고 제향의 진행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수복(守僕)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서 제향이 예법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빠르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제반 사항의 변화는 제향에서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공경을 유지하기 위한 ‘공경의 테크닉’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테크닉은 통해 의례의 효과를 높이는 것은 선왕을 높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주제자인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것이었다.
이욱, <조선후기 종묘 증축과 제향의 변화>, <<조선시대사학보>>6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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