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 때면 지방(紙榜)을 씁니다. ‘顯高祖考學生府君神位’, ‘顯高祖妣孺人000氏 神位’ 등 각 위마다 붓펜으로 한자한자 쓴 후 이를 지방틀에 붙입니다. 먼 훗날 자식들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당신을 위해 ‘현고학생부군신위’ 또는 ‘현비 유인 00씨 부인’이라 쓴 글을 보고 찾아갈 수 있을까요? 한자를 공부해 두어야 할까? 살 동안 몰랐던 것도 죽으면 알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겠죠. 지방 대신 사진을 사용하면 찾아갈 수 있겠죠. 지방은 신주(神主)의 대용품입니다. 지금은 각 가정에서 제향을 지낼 때마다 지방을 사용하기 때문에 신주를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조선시대 역시 사당에 신주를 모시고 제향을 지내는 집안은 양반가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신주는 종교문화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조상은 신주를 통해 구체화되고 의례화되었습니다. 신주는 어떤 모양일까요? 그리고 왜 만들었을까요? 조선시대 신주의 탄생이 간직한 종교적 의미를 국왕의 신주를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신주의 모양
신주는 그 대상을 형태나 색깔로 표상하지 않는 데에 그 특징이 있습니다. 사찰에 가면 다양한 부처님과 보살님의 형상을 볼 수 있습니다. 성당에 가면 예수님과 성인들의 상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신이나 인물의 형상을 본뜬 초상화나 조각상을 모신 사당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초상이나 조각상은 실제와의 형태적 유사성이 중요합니다. 고인의 외향적 모습을 통해 그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보이지 않는 신들을 형상화하는 경우 그 사실성이 의문시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전이나 신화 또는 신앙 속에 굳어진 상상력의 이미지와 표상된 이미지 사이의 유사성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신주는 이미지나 형상을 통해 특정 대상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형상으로 본다면 신주는 상호 구별이 없습니다. 신주는 오히려 규정된 법식에 어긋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재질이나 크기, 그리고 모양이 규정에 어긋나면 신주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신주는 형태적 측면에서 볼 때 ‘개별성’이 아니라 ‘정형성(定型性)’을 특징으로 삼습니다. 이러한 정형성은 신주가 지닌 인위성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신주는 뽕나무 또는 밤나무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무속이나 민간신앙에서 볼 수 있는 신간(神竿)과는 다릅니다. 신간은 나무 가지의 원형이 남아있지만 신주는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 정형화된 모형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조선시대 일반적인 신주는 두 개의 나무 조각을 앞뒤로 붙여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형식의 신주는 송대 유학자 정이(程頤)가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져있는데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 그 제작방법이 실려 있습니다. 송대 이전 일반 사대부들은 신주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천자와 제후의 신주는 그 모양이 달랐습니다. 고대 형식을 따라 만들어진 것이 조선시대 왕실의 신주입니다.
종묘에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는 납작한 패 모양이 아니라 정방형의 기둥 모양입니다. 높이는 27cm~ 30cm 정도이고 너비는 약 14cm정도이다. 기둥의 모서리는 깎아내었고, 상단은 사방을 돌아가며 깎아서 곡선을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모습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을 본뜬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신주목(神主木)에 사방과 상하의 6면에서 서로 통하는 구멍을 내었습니다. 이 구멍으로 혼령이 출입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형태의 신주는 춘추곡량전에 나오는 신주나 산해경의 상주(桑主)의 제도를 본받아 만든 것입니다. 당(唐) 나라 때 그 제도가 확립된 후 송대(宋代)까지 이어져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습니다.
신주는 이름으로 대상을 나타냅니다. 신주는 동일한 재질로 동일한 형태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그 모양으로 신주의 주인을 알 수 없습니다. 신주를 구별하는 것은 신주 표면에 적힌 이름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이름과 더불어 그 사람이 생전에 받은 관직을 썼습니다. 사대부의 경우 신주의 함중에 ‘故某官某公諱某字某神主’라고 적었습니다. 사망후 시호(諡號)를 받으면 이를 덧붙입니다. 지금 지방에 많은 사람들이 쓰는 ‘학생’이란 표현은 관직이 없는 자, 즉 일반 서민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국왕의 신주에는 무어라 적었을까요? 유교 사회에서 사람들은 태어날 때 이름을 받을 뿐 아니라 죽어서도 받습니다. 종묘에 모셔진 왕들의 신주에 적히는 이름은 대부분 죽은 후에 받은 것입니다. 왕의 신주에는 선왕의 ‘묘호(廟號)’, ‘존호(尊號)’, ‘시호(諡號)’ 등의 새로운 이름을 적었습니다. 신주는 그 지시대상을 이미지로 표상하지 않고 이름으로 나타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 역시 살았을 때의 것이 아니라 죽은 후 새로 지은 것입니다. 그 만큼 대상은 추상화됩니다. 죽은 자의 초상을 내걸면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을 보다 더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우리와 비슷한 사람의 모양으로 만들었다면 더 친근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주는 이러한 구체적 형상화를 거부합니다. 의도적으로 거부하였습니다.
2. 신주와 영혼
신주를 흔히들 신이나 혼령의 의빙처(依憑處)라고 합니다. 조상을 찾으려면 조상의 혼령이 있는 사당에 가서 신주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나무가 신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에 이름이 적었다고 신주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조선시대 신주는 개인당 하나였습니다. 그 하나의 신주는 고인의 영혼을 안착시키는 의례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신주목에 혼령을 안착시키는 마술은 상례(喪禮)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상례를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조선시대 유교 상례는 죽은 자의 혼령을 신주에 안착시켜 사당에 모시는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유교 상례에서 신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점진적입니다. 그리고 연속적입니다. 육체를 떠난 망자의 혼은 복의(復衣)을 따라 혼백(魂帛)에 머물러 있다가 무덤에서 우주로 옮겨집니다. 그리고 다시 첫 기일에 연주(練主)로 옮겼다가 상기를 다 마치고 사당으로 들어왔습니다. 육체, 복의, 혼백, 우주, 연주는 각각이 적당한 시점에 서로 인접해 있어서 혼이 옮겨오는 데에 어려움이 없게 합니다. 이러한 절차들을 제대로 거치지 않으면 신주는 신주가 될 수 없습니다. 혼령이 거하지 않기 때문이죠. 프레이즈(J. G. Frazer)의 주술론을 빌려 설명한다면 신주의 효과는 모방 주술이 아니라 접촉주술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형상은 보이지 않고, 이름은 아무데서나 적을 수 있지만 신주는 복의와 혼백, 혼백과 우주, 우주와 연주의 연속성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떠난 혼령은 자유로울 것 같은데도 특정한 공간에 머물러있기 때문에 그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서 그의 이름을 불러줄 때 즉, 그의 이름을 적어줄 때 비로소 신주는 그의 의빙처가 되었습니다. 망자를 위한 신주는 하나입니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신주를 자식들의 숫자만큼 만들어 나누어 가지면 안 될까요? 사당을 만들기 어려운 경우 조그만 신주장(神主欌)을 만들어 보관하다가 보고 싶을 때 꺼내어 보는 거죠. 형제라도 각자 결혼하여 따라 살면 서로 찾기 어려운데 큰 아들 집에만 부모의 신주가 있으란 법은 없을 것 같습니다. 종묘를 생각하면 각 지방마다 종묘를 만들어 국왕의 제사를 지낸다면 국왕에 대한 충성이 더 높아지지 않을까요? 그런데 신주는 하나만 만들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상례의 절차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하나의 신주가 계속 제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국왕의 제사가 종묘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한양 외에 전주, 평양, 경주, 개성 등에도 태조 이성계를 위한 사당이 있었습니다. 한양에도 영희전이 있었고, 궁궐에는 문소전이나 선원전이란 사당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당이 건립되는 데에 다양한 이유가 있습니다만 종묘 외에 선왕을 모신 사당을 원묘(原廟)라고 통칭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원묘에서는 신주 대신에 영정을 봉안하였습니다. 조선전기 문소전의 경우엔 신주와 다른 위판(位版)을 봉안하였습니다. 유학자들은 원묘의 건립을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이유로 생긴 원묘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신주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인하여 존재가 용인되었습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기억할까요? 이제 신주는 사라졌습니다. 시호(諡號)를 줄 곳도 없습니다. 관직도 우리에게 이미 의미가 없습니다. 화장(火葬)은 봉분만 없앤 것이 아니라 이름을 새길 묘비(墓碑)도 사라지게 했습니다. 물론 이름 석 자마저도 기억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애절하게 기억되고 싶지만 기억할 가족이 없는 경우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젠 신주가 아니라 영정 사진만 준비하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이욱, <신주: 영혼을 부르는 죽음의 둥지>(한림대생사학연구소 편, <<죽음의 풍경을 그리다>>, 모시는 사람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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