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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신주는 혼령의 집일까? 몸일까?

by 갈뫼길 2016. 12. 26.


     신주를 혼령의 의빙처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신주는 혼령이 의지하고 의탁하는 곳이라는 설명이다. '의빙'이란 단어가 낯설다면 '빙의'라는 말은 좀더 익숙할 것디다. 빙의란 혼령에 사로잡힌 바 된 것이다. 혼령을 주어로 하면 무언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옛 사람들은 혼령이 어디인가에 집착하려는 속성을 지닌 것으로 이해하였다. 중국적 세계관에서 볼 때 혼령이란 사물의 속성 같은 것이다. 즉, 사물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사물의 운동이 가진 영적인 속성이다. 죽음이란 혼령의 바탕이 되는 몸이 사라진 것이다. 몸이 죽으면 그것에 의탁한 혼령도 흩어져야 한다. 흩어지지 않고 뭉쳐진 상태의 혼령은 기존의 몸을 대신하여 어떤 사물에 의탁하려고 한다. 나무에게도 의탁하고, 동물에게도, 또 사람에게도 의틱한다. 

     신주는 이러한 혼령을 붙잡아주는 의지목이다. 몸을 잃어 방황하는 혼령을 안정하게 안정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성물(聖物)이다. 혼령을 신주에 안착시키는 과정은 단계적이고 점진적이다. 여기서 그 과정을 언급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급박하다. 결론적으로 망자의 혼령이 신주를 의빙처로 삼아서 존재한다고 가정하여보자. 그렇다면 영혼과 신주는 어느 정도 접착력을 가질까? 이 물음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만약 신주가 망가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망가지면 다시 만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만약 신주에 흠집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 흠집난 신주를 없애고 새 것으로 다시 만들어야 할까? 아니면 그대로 사용해야 할까? 

    이러한 질문을 왜 던져야 하지? 이러한 질문은 전혀 엉뚱한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실제로 제기되었다. 그것도 국가의 조정에서 매우 심각하게 논의되었다. 그리고 그 질문의 이면에는 병자호란의 아픔과 치욕이 자리잡고 있었다. 

     1636년(인조 14) 12월 10일에 압록강을 건넌 청군은 불과 나흘만에 한양에까지 도착하였다. 다급해진 조선은 12월 14일 아침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먼저 강화도로 보내고 오후에 국왕이 궁궐을 나왔으나 청군이 이미 홍제원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받고 남한산성으로 급하게 피하였다. 이후 청군이 강화도를 함락하자 종묘서 도제조였던 윤방은 종묘와 사직 신주를 급하게 땅에 매안하였지만 청군이 이를 알고 파내어 더럽히고 상처를 입혔다. 이 과정에서 명종비 인순왕후의 신주를 잃어버리기까지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망실된 것을 제외한 나머지 신주들이 한양으로 돌아왔지만 신주목에는 이때 입은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흠집이 생기고, 얼룩이 배이고, 칼에 베인 상처도 있었다. 

     이렇게 상처나가 치욕을 당한 신주를 그대로 종묘에 모셔야 할까? 아니면 이들을 버리고 다시 만들어 봉안해야 할까? 만약 선별적으로 한다면 어떤 것은 그대로 두고, 어떤 것을 고칠까? 이런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1637년(인조 15) 3월 4일 종묘서 도제조는 시민당에 임시로 봉안된 신주를 봉심한 후 강화도에서 매안과 도굴 과정에 상처를 입은 신주가 반이 넘으며 이중에서도 세종, 문정왕후, 인성왕후의 신주는 개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후 논의를 거듭할수록 개조의 대상이 바뀌었다. 3월 15일에는 12위, 동월 16일에는 28위, 윤4월에는 다시 12위, 6위, 11위로 바뀌었다가 결국 11위의 신주를 개조하였다. 

     당시 논의를 살펴보면 살펴보면 조그만한 상처라도 개조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측과 최소한의 개조를 주장한 측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치욕'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청군에 의해 더렵혀진 신주를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 최소한의 개조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영혼의 의빙처를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주장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주장이 생각하는 영혼과 신주의 관계가 다르다는 점이다. 그 차이를 '집'과 '몸'의 비유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전자의 경우를 살펴보자


강화도의 변란은 전고에 없던 것으로 두 번 매안하고 두 번 발굴하였으니, 흙속에 던져뎌 비록 약간 상했거나 많이 상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놀란 참상과 모욕됨의 심함은 진실로 피차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하늘에 계신 열성의 혼령이 어찌 굳이 여기에 다시 깃들고 싶겠습니까? 또한 어찌 그 상흔에 따라 혹 그대로 두거나 혹 개조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모두를 개조해야만 할 듯 합니다.(<<인조실록>> 15년 3월 17일)


위 인용문은 당시 신주 전체를 개조해야 된다고 주장한 박명부(朴明榑)가 주장한 내용이다. 여기에서 신주는 혼령이 깃드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마치 사람이 기거하는 집과 같아서 출입이 가능한 곳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치욕의 그곳으로 간주됨으로써 들어가기 싫은 기억의 장소가 되었다.  한편, 당시 우의정이었던 최명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지금 사람이 불행히도 전쟁을 당하여 그 피부가 더렵혀지고 사지에 상처가 나면 놀래고 치욕스러운 것이 매우 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장부를 다쳐 죽을 지경까지 이르지 않고 다시 살아난다면 화를 면한 후 몸에 묻은 오물을 씻어내고 상처를 치료할 것입니다. 비록 흉터와 흔적이 남더라도 평상시로 살아가는 데에는 이상이 없을 것입니다.(<<종묘의궤>>)


최명길은 신주를 사람의 몸에 비유한다. 상처가 낫다고 바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치유는 필요하지만 치유 후 남은 상처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몸인 것이다. 이에 의하면 신주는 이미 새로운 몸이 되어버린 것이다. 

    병자호란 후 신주 개조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개조된 신주는 원경왕후, 세종, 문정왕후, 인성왕후, 명종, 인순왕후, 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 원종, 인헌왕후였다. 이러한 결정에 나타나는 특징은 시간이다. 원경왕후와 세종을 제외하면 대체로 신주를 만들지 얼마 되지 않은 왕들의 신주를 개조하였고, 영녕전의 신주 및 세대가 먼 신주는 개조의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이는 두 입장을 수용한 것이다. 치욕을 당한 신주는 가능한 고치지만 세대가 오래되어 이미 몸과 같이 되어버린 것은 개조를 최소화한다는 것이다. 즉, 거처하는 공간에서 몸과 같이 되어버린 신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위 신주는 개조 논의 초반부터 개조 대상으로 정해졌던 의비(懿妃, 환조의 비)의 신주 모습이다. 그림에 보이는 긴 흠집은 병자호란 때 흔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국 세대가 오래되었다고 개조에서 배제되었다. 

     신주는 거기에 이름이 적힌 사람을 가리키는 패가 아니다. 영혼이 그 나무 조각에 깃들어 있다. 나아가 영혼이 그곳에서 떨어질 수 없는 몸이 되고 있다. (이욱, <<조선 왕실의 제향 공간-ㅈ정제와 속제의 변용->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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