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는 이중의 담장으로 둘러 싸여 있다. 바깥쪽 담장과 정문에 수문을 지키는 군인이 있으며, 그 안쪽에 관원이 기거하는 사무실과 제향 때 제관과 집사자들이 묵는 재실(齋室)이 있다. 반면 종묘 안쪽 담장은 정전(正殿)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그 안쪽에 정전과 공신당(功臣堂), 칠사당(七祀堂), 그리고 수복방(守僕房)이 있었다. 수복방은 종묘 정전을 지키는 수복(守僕)이 상시로 거처하는 곳이다. 조선시대 수복은 나라의 제단과 사묘(祠廟), 능침(陵寢) 등을 지키는 관노(官奴)를 가리킨다. 고려시대에는 이들을 ‘상소(上所)’라고 불렀는데 조선에서는 1438년(세종 20) 그 명칭을 수복으로 변경하였다. 수복이란 용어는 <<주례>>의 <춘관>에 나오는 ‘수조(守祧)’와 <하관>에 나오는 ‘예복(隸僕)’의 합성어인데 모두 선왕과 선공의 사당이나 능침을 지키고 더러운 것을 치우고 수리하는 일을 맡았다. 외삼문(外三門)을 지키는 군사와 수복은 엄연히 다르다. 군사의 임무는 외부의 침입을 막는 것이지만 수복은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종묘 내 건물을 청소하고 기물을 관리하고, 제향을 준비하는 일까지 맡은 종복이었다. 이런 수복은 종묘 외 문소전, 진전, 문묘, 왕릉 등 국가의 주요 향소(享所)에 있었다. 이런 수복의 거처 공간인 수복방은 사당이나 왕릉 바로 곁에 있었다. 종묘의 경우 애초 수복방은 묘정(廟庭)에 있었다. 즉, 종묘 정전을 둘러싼 담장 안쪽에 있었다.
그런데 이런 구조에서는 수복이 수복방을 드나들기 위해 묘정(廟庭)의 문을 열어두어야 했다. 국가에서 가장 성스러운 공간이었던 종묘의 문을 수복을 위해 열어두는 전도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리고 가장 성스러운 공간에 신분이 미천한 노비가 거처하여 건물이 ‘더럽혀질’ 염려도 있었다. 그렇다고 묘문 밖에 그들을 두어 종묘 수호를 소홀히 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근심으로 인하여 1732년(영조 8)년에 수복방을 담장과 나란히 짓고 안팎으로 통하게 하였다. 그리고 매일 황혼 이후에는 묘문(廟門)을 잠가 묘정 안쪽을 엄숙하고 견고히 지킬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수복방의 자리가 말해주듯이 종묘 내 수복은 성(聖)과 속(俗)의 영역 어디에도 확실히 들지 못하고 그 경계선에 있는 존재였다. 이는 가장 낮은 사회적 신분으로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던 왕의 사당을 관리하기 때문이었다. 왕을 정점으로 차별화된 신분 사회에서 천민이었던 수복은 ‘불결하다’는 편견이 항시 존재하였다. 수복은 종묘 내 기물의 도난 사건에 연루되기도 하였고, 제향이 끝난 후 제물을 나누는 일로 소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묘 제향은 수복이 없으면 거행할 수 없었다. 종묘에 상근하는 관원은 5~6명 정도였고 그들은 수복이 하는 일을 감독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을 뿐 직접적인 일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래 있지 않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종묘의 일에 숙달되지 않았다. 반면 30명이 정원이었던 수복이 종묘의 모든 일들을 맡았다. 제물을 진설하는 일은 물론이고 제향 중에 헌관이나 집사자의 행동거지도 수복의 안내를 따랐다. 그리고 오랜 기간 종묘에 있었던 수복은 종묘 역사의 산 증인이었다. 그리하여 종묘에 온 왕들은 종묘 관련 일들을 종묘 소속 관원보다 이들에게 물었다. 수복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제향의 전문인이 되었다. 예학의 지식과 무관한 직역(職役)으로서의 전문가였다. 이는 종묘 전문가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던 유교 사회의 종교 문화가 지닌 특징이었다. 그리고 유학자들과 국가 의례가 소원해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사회적으로 미천한 존재가 사회적으로 가장 존귀한 사당을 맡고 있는 이 불균형의 상황이 조선시대 국가의례, 특히 종묘의 상황이었다.
'종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묘의 공민왕 신당과 수복 (0) | 2021.11.21 |
---|---|
죽어서 받는 이름, 시호諡號 (0) | 2018.03.25 |
신주는 혼령의 집일까? 몸일까? (0) | 2016.12.26 |
신주와 혼령 (0) | 2016.02.14 |
종묘의 아름다움 (0) | 2014.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