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재

숙종대 왕실문화

by 갈뫼길 2023. 2. 12.

*저자:정만조․박용만․김백희․김윤정․정은주․김덕수․이민주․이욱․김충현

*발행일 : 2022-12-30

*출판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실

 

숙종(1661-1720)1661815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현종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167414세의 나이로 왕위에 즉위하여 47년 동안 국정을 다스리다 172068일에 경덕궁 융복전에서 승하하였다. 이 시기는 붕당정치에서 탕평정치로 넘어가던 전환기였다. 탕평정치는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무리지어 편을 가르는 것 없이 공평하게 펼치는 정치를 가리킨다. 그 탕평의 실현을 왕도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이 시기 탕평의 시작은 숙종의 탁월한 정치력에 기인한다. 그러나 개인의 정치적 능력을 넘어 탕평정치는 왕실이란 가()를 높이고 확장시키는 데까지 발전하였다. 사족의 붕당 세력이 여전히 견고하고, 문중 조직이 거대화되고 강화되던 시기에 국왕은 왕실의 권위를 통해서 자신을 높이려 하였기 때문이다.

집을 변화시켜 만든 국가[化家爲國]에서 왕실은 국가의 중심이다. 그러나 왕을 성인으로 만드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신유학에서 왕은 공적인 존재로만 부각되었다. 사대부의 자의식이 가족 질서를 강화하고 확대시켰지만 왕실의 존재는 희석되었다. 사대부의 정치가 편당으로 쪼개지고 그 가운데 백성의 안위가 위태할 때 중심으로 자처하고 나선 왕은 왕실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실의 가계를 정리하고, 역대 왕들의 문적과 유적을 찾고, , 왕후, 왕세자, 왕세자빈의 의례를 정립하면서 왕실이 새롭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숙종 대는 이러한 왕실의 자기 성찰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왕실이란 범주는 그것의 정치적 함의를 넘어서 문화의 장을 볼 수 있게 한다. 구성원의 삶과 죽음을 매개로 전승되는 왕실은 조선시대 사회문화의 정형을 이루었다. 당대 최고 권력가가 구현하는 화려하고도 장엄한 상징에서부터 유교 이념의 실천, 유교와 전통문화의 융합, 기쁨과 슬픔의 감정 등, 문화의 다양한 요소를 왕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 조선시대 촘촘한 기록문화이다. 실록과 승정원일기 등 편년사 자료 외에도 의궤와 등록, 그리고 왕의 어제, 어필 등 왕실 자료는 숙종 대 더욱더 풍성해졌다. 본 연구는 이를 기반으로 왕실의 가족, 문예, 의례라는 세 가지 주제를 살펴보았다.

첫 번째 가족에 대한 이해는 숙종의 친인척에 관한 관심과 세자 교육, 왕비의 국상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숙종어제에 나타난 공주와 의빈에 대한 예우는 숙종의 고모인 공주들과 의빈에 대한 그의 애정을 다루었다. 현종의 외아들로 태어난 숙종은 왕가의 적통이었기 때문에 왕위계승이나 정통성 문제에서 시비나 경쟁자가 없었다. 이는 개인적으로 가까운 혈욕이 부족한 것을 의미하였다. 그로 인한 고립감을 왕실의 공주, 옹주와 의빈(儀賓)을 통해 극복하였다. 어제십잠(御製十箴)과 세자교육은 세자에 대한 숙종의 기대를 잠()을 통해 살핀 글이다. 숙종의 어제십잠은 세자(世子; 훗날의 경종)를 위해 직접 지은 잠언(箴言) 10가지이다. 이를 통해서 조선시대 국왕이 지향하는 통치철학의 요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숙종대 내상(內喪)’ 자료의 축적과 의례의 정비는 숙종 대 치러진 왕실 내상에 대한 고찰이다. 내상은 왕비와 세자빈의 상례를 가리킨다. 46년간의 재위 기간 중 숙종은 6번의 내상을 치렀다. 그 가운데 여성 의례를 위한 공간이 정비되고, 백관의 복색 규정이 세분화되고, 남편인 국왕의 역할이 확대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문예에 관한 연구는 숙종이 직접 지은 어제 시문과 왕실 탑본의 장황을 다루었다. 숙종의 제화시문에 나타난 국정 운영 방향은 숙종이 그림을 보고 지은 시를 살펴보고 그 속에 나타난 국정 운영의 지향점을 논하였다. 명 황제의 서화(書畫)를 통해 명에 대한 의리명분을 강조하고, 감계화(鑑戒畵)를 통해 왕도를 추구하고, 충신과 현신을 형상화하고, 지도 및 천문도의 제작을 통해 민생과 관방의 중요성을 피력하는 숙종의 모습을 그릴 수 있다.

숙종의 대명의리와 문학적 형상화의 시점은 대명의리 관련 시문의 창작 동인을 고찰한 것이다. 숙종의 어제시 중에서 대명의리와 숭명배청의 의식이 농후한 작품은 1720(경종 1) 󰡔열성어제별편󰡕으로 따로 묶여 간행되었다. 이들 작품을 분석해보면 임진왜란, 병자호란, 명나라 패망 등의 시간, 무안왕묘, 선무사, 대보단 등은 재조지은을 상징하는 공간, 명나라 황제가 보내준 곤룡포, 국새 인문 등 명나라 관련 의물 등이 창작의 계기가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장서각 소장 숙종 대 축() 장황(粧䌙)에 나타난 문양은 숙종대 제작된 탑본(搨本)과 이십공신회맹축(二十功臣會盟軸)의 장황을 다루었다. 탑본은 망자의 지석(誌石)이나 비석(碑石)에 새겨 놓은 글을 기억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며, 이십공신회맹축은 국왕과 공신 간의 충성을 기억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축의 구조 및 제작 방법, 그리고 직물의 문양까지도 살펴보아 숙종대 격조있는 왕실문화를 보여준다.

세 번째 의례에 관한 것은 숙종의 국장을 다루었다. 숙종의 국장과 󰡔효령전일기󰡕」는 숙종 빈전과 혼전에서 작성한 영전일기(靈殿日記)를 통해서 숙종 국장의 추이를 살펴본 글이다. <<효령전일기>>는 의궤나 등록과 달리 빈전의 일상, 특히 음식 공궤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국조오례의󰡕에 이미 전례화된 조석전과 조석상식 및 주다례 외에도 매일 아침 올리는 두탕(豆湯)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외관(外官)에 의한 상식 외에도 내상식(內上食)의 실체도 찾을 수 있다. 명릉(明陵)의 조성과 석물제도는 숙종, 인현왕후, 인목왕후의 능인 명릉의 조성을 다루었다. 명릉은 인현왕후가 서거하면서 처음 조성되었고, 인현왕후의 명릉을 조성하면서 그 곁에 자신의 수릉(壽陵)을 마련하였다. 석물의 크기를 줄이고 검소하게 하였다. 그리고 인원왕후의 산릉지 역시 미리 정하고, 목릉(穆陵)의 예를 따라 같은 능역 안으로 제향과 관리가 이루어질 수 있게 하였다.

소개한 8편의 글은 장서각 자료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그 하나하나가 중요한 글이지만 이를 숙종의 시대 속에서 읽을 수 없다면 무용지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 1숙종대 시대상은 이 책을 읽을 때 반드시 필요한 안내서이다. 이를 위해서 연세와 건강상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원고를 쓴 주신 정만조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마지막으로 원고의 교열과 편집을 통해 연구 성과를 빛내주신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관계자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머릿글에서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아시아의 희생제의  (0) 2020.06.15
대한제국의 전례와 대한예전  (0) 2019.10.26
이야기를 해야 알죠  (0) 2019.08.24
쉽게 읽는 서울史  (0) 2019.08.24
조선 왕실의 제향 공간 - 정제와 속제의 변용-  (0) 2016.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