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국가 제사에 사용된 희생으로는 소, 양, 돼지가 있으며 이 중에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사용되었던 흑우(黑牛)가 가장 중요시되었다. 본 연구는 조선시대 제주도에서 중앙 정부에 진상하였던 흑우(黑牛)의 현황과 관리, 그리고 제향 중 진설(陳設) 등을 고찰하였다. 먼저 조선후기로 갈수록 줄어들거나 폐지되는 다른 진상품과 달리 흑우의 진상은 그 수효가 늘었는데 그 원인을 두 가지에서 찾을 수 있었다. 5대의 선왕을 모신 오묘제(五廟制)로 시작한 종묘는 후대에 갈수록 제사 대상이 증가함에 따라 더 많은 흑우가 필요하였다. 이는 세대(世代)의 자연적인 증가만이 아니라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늘어난 결과였다. 제주에 부가된 흑우의 수가 늘어난 또 다른 요인은 국왕의 친행(親行) 기우제 때문이었다. 한편, 조선후기 우역(牛疫)의 발생은 흑우의 사육(飼育)과 운송(運送)을 어렵게 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서울 인근 지역에서 흑우를 키우려고 하였다. 그 대표적인 시도가 안면도(安眠島)에 흑우 목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림의 훼손으로 이 사업은 지속되지 못하였다. 이런 가운데 제향에 소용되는 흑우의 생산은 제주도와 거제도에 한정되었다. 거제도에는 5마리로 고정되었지만 제주도에서는 20마리에서 계속 증가하여 1년에 진상하는 흑우의 수가 대한제국기에는 49마리까지 이르렀다.
제주도 흑우는 두 배로 나뉘어 육지로 운송되었다. 생후 3년이 지난 소들이 주로 진상되었다. 출송되는 시기는 상황에 따라 달랐지만 4월이 가장 많이 나타났다. 육지로 옮겨진 흑우들은 충청도와 전라도에 나누어 일정 기간 사육되었다가 한양의 전생서(典牲署)로 옮겨졌다. 그리고 전생서에서 대략 3개월 정도 머문 후 제향에 바쳐졌다. 제향 하루 전날 종묘로 옮겨진 흑우는 상태를 점검받은 후 도살처로 옮겨졌다. 1745년(영조 21)에 영조는 국왕이 제향 전에 직접 희생의 상태를 살피는 의식을 제정하여 흑우의 사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도살된 흑우는 모혈(毛血)과 간료(肝膋), 머리와 네 다리의 생고기, 숙육(熟肉)으로 구분되어 제상(祭床)에 올려졌다. 이렇게 조선시대 흑우는 제주도에서부터 종묘까지 긴 여정을 거쳐 제상에 올랐으며, 거리와 재난, 제향의 횟수, 국왕의 개입 등에 의해 그 공급의 양상이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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