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에 나는 신문에서 "유자와 승려가 같이 지내는 제사"로 밀양 표충사를 소개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후 7, 8년 전인가 해남 대흥사에 템플스테이에 갔다 사찰 경내 있는 표충사를 보았다. 사찰에 있는 유교식 사당이 존재하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언제가 한번 연구해 봐야지라는 생각만 하고 지나쳤는데 올해 해남 표충사 제향에 관한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어제 학술대회 발표는 무사히 마쳤지만 아직 연구해야 할 부분은 많다. 많은 과제를 차후로 미루며 조금이나마 정리하고자 한다.
해남 대둔산 대흥사에는 표충사(表忠祠)는 휴정(休靜)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유정(惟政) 처영(處英)을 배향한 사당이다. 사찰의 많은 전각 중에서 ‘전(殿)’이나 ‘당(堂)’ 외에 ‘사(祠)’라는 이름의 건물을 찾기란 쉽지 않다. ‘사’는 사당인 셈인데 휴정과 같이 본 사찰의 주지였던 고승의 사당을 ‘사’라는 이름의 건물에 모시는 경우란 흔치 않다. 이는 공양의 대상이 스님이라도 그곳의 건물이나 의식이 사찰의 형식과 구별되는 별도의 공간임을 보여준다. 표충사는 조선시대 건립과 운영에서 국가가 개입하였던 유교식 사당이다. 사찰 속 유교식 사당은 어떤 모습일까?
1714년 밀양 표충사의 건립과 1789년 해남 표충사의 건립은 조선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휴정, 유정, 영규, 처영 등 임난 때 여러 곳에서 공을 세운 승려의 역할을 국가가 인정하고 존숭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향촌 사회 원우(院宇)의 형식으로 시작된 표충사는 이훈 국가와 불교, 유교와 불교가 만나는 새로운 장이 되었다.
대흥사에는 표충사 관련 축문(祝文), 제물단자(祭物單子), 진설도(陳設圖), 홀기(笏記), 등의 자료들이 전한다. 이중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끄는 것이 진설도이다. 여기에는 24개의 음식이 나온다. 전체 4행인데 한 행에 6 가지의 음식이 있다. 그 아래에 폐백, 촛대, 작, 향합, 향로 등의 기물이 보인다. 여기엔 희생이나 육류의 제물이 보이지 않는다. 사찰에서 거행하는 제사임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 진설을 사찰의 공양(供養)과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진설도 하단에 있는 ‘작(爵)’이 그 상황을 잘 대변해준다. 작은 유교 제향에서 술을 담은 그릇, 곧 술잔이다. 사찰에서 술을 사용하는 것도 보기 어려운 일이지만 작이란 그릇을 사용하는 것은 더욱더 어렵다.
진설도의 구성은 속제의 것과 유사하게 가로 행의 방식으로 연속성을 보여주었다. 첫행에 곡류를 중심으로 한 중심의 찬품, 제 2행에 절인 음식, 제 3행에 떡류 또는 유밀과, 제 4행에 과일 등으로 진설되었다. 이러한 구성은 불교적 성격을 잘 담아 내고 있었다. 다만 이러한 찬품이 제기의 설명과 만남으로써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보였다. 현전하는 표충사 제향 자료에 의하면 사용된 제기는 궤(簋), 두(豆), 변(籩), 작(爵), 비(篚) 등이다. 이것 외 다른 제기를 사용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제기는 유교의 정제(正祭)에서 사용하던 것이므로 굳이 불교식의 제향에 사용할 필요는 없다. 관에서 제물과 함께 제기를 공급해주진 않았다. 관에서 이러한 제기의 사용을 강요한 흔적도 보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제기의 사용은 이 제사가 국가에서 허여한 것임을 과시하기 위해 필요하였다. 표충사는 국가와 불교가 만나는 현장이고, 유교와 불교가 상호 교섭하는 융합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승려만으로 구성된 제향에서 이러한 융합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관에서 지급한 음식은 있지만 그 역시 관급이란 흔적이 자연스럽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제상의 제기만 유교와 불교의 상호 교섭을 증거하는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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