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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제사/본궁

함흥본궁

by 갈뫼길 2016. 5. 1.

     함경도 남쪽 해안에 위치한 함흥은 조선시대에 왕조의 발상지로 중요시되었던 곳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선조는 신라 말기부터 전주에 살았던 토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태조에게 고조가 되는 목조 이안사(李安社)는 지방관과의 불화로 전주를 떠나 삼척을 거쳐 함경도 경흥(慶興)의 알동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 태조의 증조부인 익조 이행리(李行里)가 토착 세력의 위협을 피해 함흥의 귀주동에 정착하였다. 태조는 외가인 영흥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함흥의 귀주동에 돌아와 살았다. 이곳에서 정종과 태종이 태어났다. 이후 태조는 함흥의 남쪽 지역인 운전사로 거처를 옮겨 살았는 데 조선 건국 후에 이곳에 본궁(本宮)을 설치하였다. 본궁은 국왕이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살던 옛집을 가리킨다.



     위 그림은 함흥에 있는 태조의 본궁 모습을 주변 산세와 더불어 그린 것인데 <<북도능전도형北道陵殿圖形>>에 실려있다.  이 함흥 본궁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여기에서 선왕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지내는 사당의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점이다.  

     함흥 본궁에는  목조익조도조환조의 네 왕과 그들의 비妃, 그리고 태조와 신의왕후 및 신덕왕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본궁의 제향이 국가 사전祀典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록에서는 이 본궁의 제향을 폐지해야 할 음사淫祀라고까지 비판하는 기사들을 볼 수 있다. 

     사전에 등재되지 않는 제사, 곧 비공식적인 제사의 주체는 누구일까? 실록에서 함흥본궁의 기사는 중종대부터 나타난다. 1512년(중종 7) 2월 기사에 의하면  함흥본궁에는 여러 신당이 있는데 여기서 '기은祈恩'이란 행사를 거행한다고 하였다.  기은은 이름있는 산천이나 신을 찾아 복을 비는 의례인데 주로 무당이 주관하였다. 송악, 덕적, 감악 등의 명산이 주요 기은처였다. 실록 기사를 좀더 보면 함흥본궁의 기은제 한양 궁궐 내 왕실에서 파견한 무당이 주관하였다. 이들은 국왕의 의복과 청개靑蓋, 홍개紅蓋 등 국왕의 의장을 갖추고 말을 타고 본궁과 함흥의 성황사를 오가며 굿판을 모셨다. 함흥의 성황신을 태조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그 행차와 굿하는 모습을 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북을 둥둥 울리며 하늘에 있는 선조들의 영혼을 잡다아가 회롱하니 실로 효성스럽고 인자한 자손들로서 차마 할 일이 아닙니다.(<<중종실록>> 7년 6월 10일)



     은제(祈恩祭)로 주목을 받았던 함흥 본궁은 결국 기은제를 폐지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중종의 답변으로 마무리되었다.

    인조대 다시 등장하는 함흥본궁의 제향을 살펴보면 무당은 사라지고 내수사內需司의 자체적인 제향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선왕을 제사지내는데 향축도 없고, 제관을 맡은 관리도 없으며, 내수사 노비들에 거행되는 제향은 유자들에게 여전히 불경스럽게 비쳤다. 관리와 그곳 유생들이 제사의 폐지를 주장하였지만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런 논의 속에서 함흥본궁 제향의 기원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볼 수 있다. 

    첫번째 폐지를 주장하는 유자들의 관점으로 본궁 제향이 광해군 때 별차 김경수에 의해 임의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두번째 내수사 관원들의 주장으로 본궁 제향이 태조의 명에 의한 것이다. 애초 본궁 소속 양인에게 제향을 맡겼다가 선조대 회령 지역 여진족 반란 때 양인이 군대에 편입되면서 내수사 노비들이 제향을 맡았으며, 광해군 때에 무녀가 잠시 제향에 참여하였지만 인조 반정 이후 이를 혁파하였다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이러한 두 주장 모두 자기에 유리한 팩트를 가지고 기존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중종대 보였던 무당 주관의 의식은 임란 이후 사라지고 내수사에서 비공식적으로 제사를 거행하였다는 것이다.

     함흥본궁이 다시 관심을 받게 되는 것은 숙종 때이다. 1695년(숙종 21)에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신위가 이곳에 봉안되기 때문이다. 이는 함흥본궁의 제향이 국가 제향의 하나로 승인을 받는 것나 마찬가지였다. 이 일에 적극적이었던 민진후는 함흥본궁을 원묘原廟의 한 형태로 간주하며 그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영조대에 이르면 함흥과 영흥이 왕업의 발흥지로 주목받게 되고 태조 관련 유적지에 대한 현창 사업이 크게 일어난다. 그 결과 중 하나가 <<북도능전지北道陵殿誌>>이다. 그리고 정조대에 들어와  그 의례가 본격적으로 정비되어 국가 제사의 하나로 정립된다. 1791년(정조 15)에 정조는 서영보를 함흥과 영흥에 보내어 두 본궁의 제향을 살펴보게 하고 그 제도를 개혁하여 <<함흥본궁정례>>를 만드다. 그리고 1795년(정조 19)에는 이를 보완하여 <<함흥본궁의식>>을 다시 간인하였다. 

    <<함흥본궁의식>>에 실린 6조목의 범례 중 그 첫번째에서 정조가 함흥본궁의 제향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 수 있다. 정조는 함흥본궁의 건립을 국초 도성에 건립한 계성전과 같으며, 본궁의 제향이 번잡하고 세속에서 먹는 음식을 가리지 않은 것은 문소전의 전례를 따른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정조는 이렇게 원묘의 존재를 통하여 비유교적인 요소들을 국가 제향으로 정당화시켰다.

    그렇다면  함흥본궁에서는 어떤 제사를 거행하였을까? 이곳 제향은 제사 대상에 따라 '선왕에 대한 제사'와 '별에 대한 제사'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에 속한 것으로 삭망제, 별소제, 별대제가 있다. 별대제는 1월 1일, 4월, 10월에 거행하는 큰 제사를 가리킨다. 별소제에는 춘절제(2월), 반행제(6월), 추절제(7월), 산제(8월), 추석제(8월), 동절제(11월) 다례(동지) 등의 제사가 있다. 반행제는 1년의 반을 지낸 후에 거행하는 일종의 기은제이다. 산제는 산천제일 것 같은데 조상 제사로 설명되고 있다. 별대제 중 4월과 10월의 제향이 중요하였다. 이때에 궁궐의 내전에서 의복과 향축 등을 보내기 때문이다. 


     

반면 별에 지내는 제사로 태백제, 야백제夜白祭, 야흑제夜黑祭, 오상제五箱祭, 가사제袈裟祭 등이 있다. 태백제는 본궁에서 서쪽으로 20리 정도 떨어진 제성단에서 거행한다. 이것은 태조가 태백신에게 제사하던 것을 모방한 것이다. 본궁에서 제성단까지 가는 퍼레이드는 조선전기 기은제에 보이던 것의 유풍인 것 같다. 태백제를 지낼 때 제단 아래에서 오상제를 지내고, 태백제가 끝나면 별도로 가사제를 지낸다. 그외 야백네와 야흑제는 본궁의 북쪽 담장 내에 있는 제단에서 거행하는 제사이다. 이러한 제사들의 유래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유교와 무관한 토착적인 제향이 왕실이란 울타리 내에서 보존되어 전승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함흥본궁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조선시대 국가 제사 중에서 가장 비유교적인 것, 그래서 사전祀典의 울타리 밖에 있으면서도 보존되었던 조선 전기 토착 의례의 잔존을 여기서 볼 수 있다. 물론 무당도 사라지고, 제향의 절차도 유교식으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제물의 구성에서 그 토착성을 유지하고 있다. 음식은 그 만큼 늦게 변화는 문화 요소라 할 수 있다. 


이욱, <<조선 왕실의 제향 공간 - 정제와 속제의 변용->>,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