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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제사/진전

문소전과 상식(常食)

by 갈뫼길 2016. 1. 24.

문소전은 애초 태조비(太祖妃)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초상화를 봉안하고 제향을 거행하였던 진전(眞殿)이었다. 당시 진전의 건물 이름은 인소전(仁昭殿)이었는데 태조 사후 그의 혼전으로 사용되면서 문소전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종묘에 태조의 신주를 옮긴 후에는 이곳에 태조의 초상화를 모시고 원묘로 삼았다. 한편, 1420(세종 2)에 승하한 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혼전(魂殿)이었던 광효전(廣孝殿)도 태종 사후에 그의 혼전으로 사용되었다가 부묘 후 원묘로 지속되었다. 그러나 초상화를 모셨던 문소전과 달리 광효전은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원묘는 종묘 외에 건립된 왕 또는 왕후의 사당을 가리킨다. 고려시대에는 종묘 외에도 왕의 초상화를 모신 사당이 여러 곳에 있었다. 조선 초기 태조의 문소전은 고려시대 이러한 진전의 영향을 받아서 건립된 것이었다. 반면 태종의 광효전은 유교의 영향을 받아 초상화를 위판으로 대체하였다. 그리고 1432(세종 14)에 원묘는 또 다시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세종은 궁궐 내 북동편에 이전과 다른 형식의 원묘를 짓고 문소전이라 하였다. 새로 건립된 문소전은 경복궁 내 북동편의 후원 안쪽에 있었는데 태조를 포함하여 5대의 선조를 함께 모시는 사당이었다. 태조의 문소전이나 태종의 광효전이 각각의 사당이었다면 이곳은 종묘와 같은 공동의 사당이었다. 이런 형식은 고려시대 경령전과 유사하지만 초상화 대신에 위판을 모셨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형식이었다. 궁궐 밖이지만 도성 내 가까이에 종묘가 있으므로 문소전의 건립은 결국 같은 왕들을 모신 두 개의 사당이 공존하게 된 것을 의미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종묘를 가까이 두고 이러한 사당이 왜 필요하였을까? 이에 대해 세종은 종묘가 태고의 예를 숭상하여 조상을 신으로 모시기[神之] 위한 것이라면 원묘인 문소전은 평상시와 같이 친근하게 모시기[親之]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종묘가 평상시에 사람을 섬기는 것과 달리 조상을 초월적 존재로 대접한다면 문소전은 삶과 죽음의 단절을 외면하고 살아계실 때의 친밀함을 유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생시의 효도를 연장하려는 문소전의 논리는 신도로 모시는 종묘와 대비되어 인도(人道)을 실현하는 장으로서 그 존재의 정당성을 확립해 나갔다.

문소전은 이러한 친밀함을 제향의 음식을 통해 실현시켰는데 이를 상식(常食)의 진설이라 부를 수 있다. 문소전과 왕릉의 제물 진설은 둘 다 속제(俗祭)’의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에 거의 동일하다. 왕릉과 문소전의 찬탁은 모두 유밀과(油蜜菓)와 실과(實果), 그리고 떡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것은 문소전의 제향이 희생과 변두(籩豆)로 구성된 종묘 제향과 달리 유밀과 중심의 속제임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릉과 원묘의 진설에 차이가 나는 것은 고기 반찬의 유무에 있다. 왕릉에서는 희생 뿐 아니라 고기가 들어간 제물을 일체 사용하지 않는 반면 문소전에서는 고기 반찬을 허용한다. 희생은 아니지만 고기가 들어간 탕을 올린다. 문소전은 하루에 문소전에서 나타나는 육선은 신에게 바치는 희생이 아니라 생시의 일상식(日常食)’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살아 계실 때 부모님께 올려드린 음식을 사망 후에도 차마 끊지 못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러한 상식은 생시와의 단절이 아닌 연속성을 드러내는 것이고, 효의 실천이라는 강한 도덕적 가치를 실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 다음으로 문소전에서는 하루에 끼니 때마다 식사를 준비하여 올렸다. 이것은 살아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섬기는 방식을 모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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