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선>> 통권 56호(2004년 4월 25일 발행) (【특집 I】 - 봄, "죽음"을 말하다)
현대의 소외된 죽음 - 이 욱 -
1.
나이 사십에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우습고 불경스럽다. 죽음에 순서가 없다지만 아직 죽음을 가까이 한 별다른 경험이 없으므로 어색하기도 하며, 괜히 죽음에 대한 글을 썼다가 죽음이 나의 것이 되지 않을까라는 불안감도 없지 않다. 이런 나의 자격지심을 넘어서 오늘날 죽음을 말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까닭은 '죽음'의 소식을 너무 자주 접하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를 비롯한 각종 사고사는 이제 너무나 일상화되었기에 숫자와 관계없이 무관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줄을 잇는 자살의 소식에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분신자살이나 성적 비관에 따른 청소년 자살이 이미 고전적인 것이라면, I.M.F. 이후 가정 경제의 파탄에 따른 일가족 자살, 부조리 또는 불명예와 연루된 자살, 소녀 가장의 자살 등 다양한 죽음의 소식이 들려온다. 최근 자살은 경제적 빈부, 사회적 지위의 고하, 연령의 노소와 상관없이 퍼지고 있다. 이런 자살의 소용돌이 가운데 죽음의 심오한 차원을 논의할 수 있을까? 죽음에 대한 모든 고상한 언설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뻔뻔하게 살기?? 운동일 것이다. 죽음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가끔씩 저 ??국회의원들처럼?? 뻔뻔하게 살필요가 있겠다.
2.
사실 천수를 누리든, 자살을 하든지 사람은 모두 죽음이란 끝에 도달한다. 죽음은 빈부의 차이, 연령의 고하 그리고 죽음의 방식과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동일한 종착역이다. 고가의 수의와 호화로운 무덤이 죽은 이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겠는가? 매장을 하든지 불로 태우든 새의 먹이로 주든지 시신은 말이 없다. 그 침묵의 죽음에서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간이 누구나 경험하는 가장 보편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는다??는 사실 외에 죽음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 이전의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경험하였지만, 죽음에 대한 증언을 어느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다. 죽음의 내용만이 아니라 그 죽음이 언제 내게 닥칠 지도 알 수 없다. 죽음의 정체에 대한 이런 무지(無知) 또는 미지(未知)는 우리로 하여금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더욱이 우리는 이러한 죽음을 혼자서 감당해야 된다. 아주 옛날엔 저승길 동반자를 만들기 위해 순장의 제도가 있었다지만, 그리고 동반 자살이 있고, 또 떼죽음이란 슬픈 사건도 있지만 죽음은 나누는 것이 아니라 혼자 감내하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 앞에 서면, 타자의 죽음이 아니라 죽음이 나의 것으로 될 때면, 앞서 언급한 죽음의 보편성과 사실성이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한다. 모두 다 죽는다는 객관적 사실성이 나의 죽음을 합리화하지도 않으며 위안도 되지 않는다. 죽음은 이같이 지극히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낯선 사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보편성과 개별성이라는 상충된 성격이 상호 결합하면서 죽음은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3.
자신의 실체에 대해 침묵해 온 죽음이지만 인간은 죽음의 원인을 탐구하고 죽음 이후의 모습을 그려왔다. 특히 종교는 이 죽음에 대한 해답체계로 오랫동안 기능했다. 죽음을 죄의 삯으로 돌리기도 하고 무명(無明)의 결과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죽음 이후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보이는 현세의 삶을 기획하며 그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었다. 해답체계일 뿐 아니라 종교는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는 삶을 정리하는 방법과 사후 세계를 위해 필요한 항목들을 미리 준비하도록 하였다. 또한 주위 사람들의 죽음을 당해 그들의 시신을 처리하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 준비해야할 것을 일러주었다. 나아가 죽은자와 산자 사이에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미사, 천도, 제사 등 다양한 의례로 상호 관계를 맺도록 해주었다. 죽음과의 만남은 이러한 결을 따라 이루어져왔다. 사후 세계에 대한 많은 변론이 죽음으로 인한 공포와 아픔을 완전히 무화시킬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앙으로 덮어도 삐져나오는 회환의 아픔을 이러한 결에 따라 토해내며 시간이 치유하길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 죽음을 대하고 다루는 모습은 매우 다르다.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외면당하는 죽음이다. 근대 이후 죽음은 삶의 주변으로 계속 밀려났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종교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사후 심판이나 천국과 지옥의 이미지 속에서 성장한 기독교에서도 이제 죽음과 사후에 대한 설교는 매우 적은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 전통 문화 중 하나인 유교의 관례, 혼례, 상례, 제례 중에서 가장 긴 시간을 요구하였던 상례도 이젠 3일이면 끝을 낸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집에서 숨을 거두는 것을 바른 죽음으로 여겼던 옛날과 달리 오늘날 죽음과 그에 따른 의례는 일상적인 삶의 공간을 벗어나 병원이란 격리된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이미 죽음은 종교가 아니라 의학의 문제로 넘어갔으며, 여기에서 다루어지는 죽음은 회피와 정복의 대상으로 되었다.
반면 이와 다른 또 하나의 모습으로 가상적 죽음의 일상화이다. 실제적인 죽음이 삶의 공간에서 배제되었지만 근대 이후 새로운 매체를 통해서 간접적인 죽음을 쉽게 접한다. 먼저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죽음의 소식을 매일 듣고 본다. 또한 영화, 비디오, 드라마 등을 통해 죽어가는 모습, 죽은자의 모습, 그리고 죽이는 모습까지도 쉽게 누워서 ??즐긴다??. 게임을 통해 유혈이 낭자한 죽음의 현장을 만들고 참여하기도 한다. 유치원에 다니는 꼬마들도 총 맞고 죽는 모습을 리얼하게 연기할 수 있다. 차갑게 식어 가는 육체, 죽음에 저항할 힘도 없는 육체의 마지막 신음소리 등을 실제 느끼지 못하였지만 가상의 죽음에 익숙해져 있다. 이러한 가상의 죽음 이미지는 실제적인 죽음을 감추고 왜곡할 뿐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죽음을 선택하고 감행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
4.
죽음을 선택하고 죽음을 감행한다는 것은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비추어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인류사에서 자살이나 순교와 같이 인위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끊는 경우가 실제 많았다. 현대 사회에 크게 문제시되는 의료상 ??안락사(安樂死)??도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 안락한 죽음이 있을까? 모순적인 조합어 같지만 안락과 고통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이름이다. 안락사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안락사에 대한 논의는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실현하겠다는 환자의 소망과 이를 돕거나 방조하는 제 3자의 행위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논쟁이다. 불치의 병으로 고통 중에 있는 환자일지라도 살려는 욕망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장기적인 질병으로 인한 고통은 본인과 가족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빠져나갈 수 없는 죽음의 문턱에서 온몸을 짓누르는 육체적 고통과 이를 보는 가족들의 고통을 빨리 끊어버리고 싶은 환자의 마지막 소망이 안락사의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만약 환자의 살고자 하는 욕망과 가족의 바람이 어긋나는 경우엔 어떻게 될까? 살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환자에게 안락사가 가족과 병원에 의해 강요될 가능성은 없을까? 그리고 넓은 의미에 자살과 타살일 수 있는 이 행위가 생명존중의 윤리와 대치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구심 때문에 안락사에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하지만 죽음은 이를 대하는 태도나 고통의 정도가 개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잣대만을 댈 수 없는 상황임을 안락사의 예는 잘 보여준다. 사실 이러한 안락사는 의료상 '불치의 병'이란 극한 상황을 전제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치의 병??이란 객관적인 조건이 아닌 상황에서도 자살의 유혹은 일어난다. 한 개인이 당하는 고통의 깊이는 의학을 통해서 객관화시킬 수 없는 매우 주관적 요소이다. 친구 또래의 조그만 집단에서 사회 전체의 넒은 범위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에서의 소외감이나 박탈감은 개인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준다. 가족을 비롯한 공동체에서 자신에 부과한 책임 역시 무거운 짐이다. 개인의 좌절 역시 큰 고통이다. 이러한 고통의 상황 상황마다에서 자살의 충동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안락사와 달리 자살은 죽음을 알려주고 지켜봐주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혼자라는 슬픔이 자살에 다가가게 한다. 그러므로 자살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찾는 길인 동시에 자신의 고통과 원통함을 알리기 위해 몸으로 쓰는 메시지이다. 우리는 그의 예상치 못한 죽음을 통해서야 그 고통을 알게 된다. 안타까운 현실은 우리의 삶이 이전보다 훨씬 윤택해진 것 같고, 자신을 드러내고 알리는 것이 익숙해진 문화 속에서, 그리고 다양한 소통의 도구를 가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메시지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5.
한편, 현대 사회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또 하나의 죽음은 일상적인 죽음이다. 앞서 말하였듯이 현대 사회에 실제적인 죽음은 감추어져 있다. 자살이나 살인 등 극적인 죽음만이 알려질 뿐이다. 그러나 극적인 죽음은 아니지만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아니 죽음은 극적이지 않을수록 축복받은 것이다. 이를 우리는 자기의 "명(命)"을 다하였다고 한다. 주어진 생명을 온전히 다 누리고 깨끗하게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다.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이 이전보다 훨씬 길어졌지만, 사고사의 위험을 벗어나 질병의 덫에 빠지지 않으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너무나 큰 행복이다. 더욱이 자식과 가족에게 추한 모습 보이지 않고 깨끗하게 갈 수 있을 때엔 축복받은 죽음인 동시에 삶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객관적인 조건도 중요하지만 내 스스로가 죽음을 받아들이고 화해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죽음은 두려운 존재이다. 그러나 미래에 펼쳐질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보다 지나온 삶에 대한 회한 때문에 두려운 것일 수 있다. 삶은 미래의 소망을 향해 움직이지만 그 소망은 사실 지난날에 대한 아쉬움과 부끄러움, 그리고 회한에 뿌리내리고 있다. 죽음이 진정 두려운 것은 이러한 지난날의 아쉬움을 풀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앗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죽음은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이 살아온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다. 한편, 죽음은 죽은 자의 것만이 아니라 죽음을 가까이 지켜보며 안타까워하는 산자의 몫이기도 하다. 죽으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그 동안 같이 하였던 사람에게 아픔과 슬픔을 남기고 가는 것이다. 불현듯 가버리는 경우 그 아픔은 더하다. 이러한 아픔을 받아 갈무리하는 것은 대개 가족이다. 죽음은 육체적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신을 거두고 망자에게 이별을 고하는 의례들을 통해서 마무리된다. 우리 문화에서 이러한 의례의 주체는 역시 자식을 중심으로 한 가족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족은 흔들리고 있다. 죽은 후 제사를 받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 큰 기대일지도 모른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변했을 뿐 아니라 핵가족도 이혼율의 증가로 분열되고 있다. 고령화 사회에 노인은 많아지지만 그들의 죽음을 지켜줄 가족은 무너지고 있다. 아직 우리 사회에서 병원의 문턱은 높다. 실버타운이나 노인 병원에서 편안한 노후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 사회가 이제 관심을 가질 부분은 병원과 가족에서 외면당하는 죽음이다. 병을 고치고 죽음을 지연하기 위한 병원도 필요하지만 죽음을 맞이하여 삶을 정리하고 위로 받을 수 있는, 그리고 외롭지 않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생명의 시작이 자신의 의사가 아니었듯이 죽음도 자기 의사로 결정되지 않는다. 탯줄을 끊고 몸을 씻겨주는 따스한 손길 때문에 삶이 의미 있는 것처럼 굳어지는 육신을 바로 펴주고 씻겨주는 따뜻한 손길 때문에 죽음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사십에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불경스럽다는 인식 때문에 죽음 앞에 고민하는 사람의 눈빛을 알아채지 못할까 두렵다. 그 불경함 때문에 내 죽음이 불현듯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스럽다. 극적인 죽음이 아니라 아름다운 죽음을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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