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

숭릉의 정자각

갈뫼길 2017. 4. 9. 21:01

    왕릉을 답사하면 명당의 좋은 땅에 목재 건축물과 석물을 만나게 된다. 명당이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다. 좋은 기를 가득 가진 땅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저 좋은 곳이라 알려진 곳을 자주 보고 느낄 따름이다. 좋은 땅을 찾게 되면 혈처에 좌향을 적어 표시한 후 본격적인 왕릉이 조성된다. 이때 작업을 구분해 보면 먼저 나무를 베고 땅을 파고 고르는 일과 먼 곳에서 석재와 목재를 가져오는 일이 있다. 이 일은 기초이면서도 힘든 일이다. 즉, 많은 인력들이 들어간다. 백성들의 힘을 가장 많이 빌리는 것들이다. 두번째로 본격적인 건출의 일인데 이를 목재 건축, 회축, 석상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목재 건축물은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 비각, 재실 등이 있다. 그 중에서 당연 으뜸은 정자각이다. 





    정자각은 상례 기간에 빈소의 역할을 하는 곳이며, 재궁을 현궁에 안장한 후에는 제향을 거행하는 곳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빈소를 위해 '가정자각'을 별도로 만드는 경우가 있으므로 왕릉 제향을 위한 주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정자각'이란 '丁'자 모양으로 생긴 공간이란 뜻이다. 왜 이런 공간이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중국에도 없는 한국의 독특한 양식이라 한다. 나의 추측이지만 이 정자각의 모양에서 앞으로 튀어나온 부분에 의미를 크게 부여해본다. 이 부분을 배위청이라 부르는데 이는 절하는 공간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정자각 내부는 선왕의 침전이라 부를 수 있다. 즉, 정전의 전체가 침전으로 왕이 머무는 공간으로 간주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이렇게 정자각을 이야기하는 것은 숭릉의 정자각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다. 왕릉 전체를 모두다 본 것은 아니지만 여태까지 내가 본 것 중에서 숭릉의 정자각이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 위엄이 있으면서도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이다.  숭릉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이다. 정전이 좌우 5칸이라 3칸으로 된 것보다 날개를 펼친 것처럼 균형 있게 서있다. 그 뿐만 아니라 배위청 역시 3칸으로 길게 뻗어 부족함이 없는 것 같다. 

    좌우 5칸의 정자각을 서오릉의 익릉에서 보고 감탄한 적이 있다. 익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경사가 있어서 더 위엄스럽게 보인다. 또한 지붕과 기둥의 비율이 비슷하게 느껴져 육중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 숭릉은 높고 기둥 덕분에 집 전체가 날렵하고도 화려한 역동감이 느껴진다.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이 대부분 주변 환경을 고려하고 그와 어울려 진 것이라 정자각 역시 주변 경관과 뗄 수 없다. 뒤쪽 봉분 있는 언덕을 등지고 서있는 정자각은 봉분을 가려 보호해주고, 망자와 산자의 만나는 접전의 장소로 기능하였다. 

    여러 곳의 정자각을 보면서 그러한 기능과 달리 '위엄'은 어떻게 드러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비슷한 구조물인데 어떤 것을 보면 그 위엄스런 모습에 옷깃을 여길까? 물론 지극히 주관적이겠지. 숭릉의 정자각에서 느낀 나의 감정은 내 주관적인 평가일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위엄'이란 요소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지를 살펴보고 싶다. 

    조선의 왕릉은 권위와 인정(仁政)의 대립 속에서 그 모양을 지탱해온 사회적 건축물이다. 위엄을 펼치고자 하나 그것은 백성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한이 없을 수 없었다. 그리고 세조와 숙종, 영조 등의 왕에 의해서 석물과 목재의 건축물이 축소되어가는 경향을 보였다. 민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건축물의 위엄도 줄어드는 것 같다. 물론 웅장해야만 위엄이 생기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것과 구별되지 않는 소박함이 위엄을 보장하진 않는다. 꼭 위엄을 갖추어야 되는가?라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져 보이는 건물이 있고, 위엄스런 건물이 있다. 이러한 미적 감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숭릉의 정자각에서, 죽음 앞에서 부질 없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