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조선 왕실의 제향 공간 - 정제와 속제의 변용-

갈뫼길 2016. 1. 10. 22:18

 

조선시대 유교의 국가 제사와 씨름하는 동안 유교가 내게 던진 화두는 공덕(功德)’이다. 유교에서 국가 제사는 신과 인간이 공덕을 매개로 만나는 의식(儀式)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먼저 공이 있고 덕이 뛰어난 신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 공덕에 상응하는 지위를 갖춘 자가 제사를 거행하였다. 이러한 상호 교감의 통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공공성을 바탕으로 한 공덕의 논의가 전제되어야 했다. 국왕이 죽으면 공과 덕에 따라 시호를 정하고, 공덕이 있는 신하를 가려 공신당에 모시고, 학문과 덕행에 뛰어난 자를 문묘에 모시는 제반 과정들 모두가 공덕의 시스템과 연관된 것이었다. 이러한 공덕의 의례화는 효를 바탕으로 한 가족의 윤리를 넘어서 공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공덕의 좌표에서 왕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조선후기로 갈수록 국가 제사에 혈연적 요소가 지나치게 개입하고 왕실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본 연구는 국가 사전의 운영에서 왕실의 제향이 가지는 존재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귀일된다. 나는 이 문제를 속제(俗祭)’소외라는 관점에서 풀었다. 나는 왕실의 제사가 종묘의 정제(正祭)를 제외하면 대부분 속제의 범주에 속한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국가에서 왕릉과 다양한 형태의 사당을 배제하지 않고 사전 속에 포용하는 정당화의 논리와 그것이 지닌 문화사적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존재의 정당화는 정제(正祭)인 종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제향 공간을 요청하는 이유를 가리키며, 문화사적 의미란 유교과 토착화과정 속에 발생하는 문화적 변용을 속제가 보여준다는 점이다.

한편, 소외란 국가의 공무로부터 점차 제사가 점차로 배제되는 것을 가리킨다. 조선후기 왕실의 제사 대상과 의례의 가지수는 전기에 비해 늘어났고 이에 따라 국가 제사의 전반적인 숫자가 늘어났다. 그 증대의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나는 이 문제를 종묘 제향에 소용되는 시간, 국가 제사와 공무의 갈등, 제관의 차정 등을 통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 공무(公務)로부터 소외되는 제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는 관품의 위계를 통해 제사의 공덕을 표현하고자 했던 국가 제사의 기본 방향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교 이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공의 시스템을 모색하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은 근대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이욱, <<조선 왕실의 제향 공간>> , 한국중앙연구원 출판부,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