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

신이 좋아하는 음식, 인간이 좋아하는 음식

갈뫼길 2014. 10. 5. 15:52

()이 좋아하는 음식, 인간(人間)이 좋아하는 음식.

  이욱

 

많은 사람에게 제사에 대한 추억은 제상에 올려진 제물(祭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제상의 음식은 어린 마음을 혹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부엌에서 나는 음식의 향내는 신을 부르기에 앞서 산 자의 후각을 깨웠으며, 희미한 촛불 아래서도 과실과 떡, 고기 음식은 빛을 발했습니다. 굶어죽은 사람도 아닌데 조상들은 왜 그렇게 먹거리에 집착할까? 신이 정말 먹는 것일까? 음식이 없는 제사가 가능할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제사를 바라보면 제사의 전반적인 과정이 음식과 연관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국가 제사에서도 제물을 준비하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습니다. 장서각에 소장된 자료 중에는 제물에 관한 내용이 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봉상시(奉常寺)에 편찬한 <<태상지(太常誌)>>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봉상시는 국가 제사를 거행할 때면 제물을 공급하는 관서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의하면 조선시대 국가 제사는 제물에 따라 희생(犧牲)을 올리는 제사와 유밀과(油蜜菓)를 올리는 제사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국가 제사를 일반적으로 혈식(血食)’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국가 사전이 희생을 도살하여 바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희생을 준비하는 제사를 정제(正祭)라 부릅니다. 조선시대 사전 중에서 혈식의 모습을 가장 섬세하게 보여주는 것이 종묘의 제향입니다. 희생을 맞이하여 살피는 것이 의례의 과정에 포함되어 있고, 도살한 희생을 모혈(毛血)과 간료(肝膋, 간과 발기름), 날고기, 익힌 고기 등으로 나누어 제상에 올립니다.

반면 왕릉제는 희생을 일체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유밀과라는 전통 음식이 중요합니다. 유밀과는 곡분을 주원료로 하고 기름[]과 봉밀(蜂蜜)을 이용하여 만든 음식으로 조과류(造果類)의 일종입니다. 왕릉의 제상에는 중배끼[中朴桂], 홍산자(紅散子)와 백산자(白散子), 다식(茶食) 등의 유밀과가 앞쪽에 있고, 그 뒤로 과일, , 탕과 국수 등이 놓입니다. 이렇게 희생 대신에 유밀과를 올리는 제사를 종묘의 정제(正祭)와 구분하여 속제(俗祭)라 하였습니다. 왕릉의 제상은 조선전기 당시 유행하거나 익숙한 것을 따랐기에 그때의 음식 문화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왕릉 제향에서 고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 역시 조선 초기 불교 영향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중국 고대를 모델로 한 제사 형식에서 우리나라 토착적인 형식을 보존하여 전승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물의 차이는 그릇의 차이를 가져옵니다. 희생을 올릴 때에는 생고기이든 익힌 고기이든 생갑(牲匣)에 담아 조()라는 제기에 놓습니다. 피나 국물이 흐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반면 유밀과는 제상에 올릴 때 우리(亏里)’에 넣어 높이 쌓아둡니다. 우리는 울타리와 같은 뜻으로 유밀과를 높이 쌓아도 흐트러지거나 쓰러지지 않게 지지해주는 틀입니다. 우리 속 유밀과는 그 모양과 색깔이 그대로 노출됩니다. 홍색과 흰색의 산자는 더욱 두드러집니다. 접시 위에 있는 9가지의 떡 역시 그 색감을 자랑합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왕릉 제상에는 꽃을 올렸습니다. 이와 같이 왕릉의 제상엔 그릇의 위엄이나 엄숙함이 최소화된 반면 화려한 색으로 식감을 돋웁니다. 생고기와 맛을 내지 않는 질박한 것을 우선시하는 종묘 진설과 확연히 다른 부분입니다.

혈식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 먹는 음식이라 여겼습니다. 상례(喪禮)를 모두 바치고 종묘에 모셔진 선왕은 이제 인간이라기보다 그 공덕에 힘입어 나라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를 위한 제사가 혈식입니다. 그러나 혈연으로 연결된 선왕은 초월의 신이기 이전에 늘 가까이하던 가족이고 친척입니다. 생전에 못 다한 봉양이 한스럽기에 이 세상 사람이 좋다는 것을 해주고 싶습니다. 제사에는 이렇게 산 자의 욕망을 넘어선 초월성과 삶의 연속성이 공존합니다.

 

마지막으로 조선 후기 국가 제사를 후기와 비교하면 속제(俗祭)의 일방적인 확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왕릉 뿐 아니라 궁원(宮園)과 진전(眞殿)이 늘어남에 따라 유밀과를 중심으로 한 속제의 진설은 과잉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늘어납니다. 효를 바탕으로 한 속제의 증가가 공공의 질서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조선후기 국가 제사가 풀어야 할 과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