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준경묘와 영경묘
삼척에 있는 준경묘를 처음 찾았을 때, 마치 수줍은 색시가 자신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겹겹히 둘러싼 숲길을 걸어 그 모습을 마주대할 때 호기심과 기쁨이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높은 소나무 숲속 외로움의 나날들 속에서도 자신을 지켜온 아늑함과 위엄을 느낄 수 있었다.
준경묘는 태조 이성계에게 5대조가 되는 이양무(李陽武)의 무덤이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영경묘가 있는데 이는 이양무의 부인 삼척 이씨(李氏)의 무덤이다. 준경묘는 워낙 명당 자리로 유명해 풍수 연구자들의 주요 답사 코스 중 하나이다. 500여 년의 조선 왕조를 낳은 어머니 같은 땅이다.
그러나 내가 이 준경묘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한 것은 무덤이 가져다준 종교 현상이었다. 준경묘의 존재는 조선초기부터 알려졌다. 그러나 피장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가 없어 조정에서는 묘역(墓域)을 보호할 뿐 왕실의 묘로 공인하지 않았다. 세종대 재미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곳에 죽은 사람의 시신을 태우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을 처리하는데 중요한 요소는 이 무덤이 왕실의 선조 무덤인가 아닌가라는 것이었다. 만약 왕실 무덤이라면 여기서 시신의 태우는 불경의 행위는 반역죄에 해당하여 해당자는 중벌을 면할 수 없었다. 여러 논란 가운데 세종은 이 무덤을 왕실 모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름 없는 큰 무덤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후 이 무덤이 왕실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여러 사람들에게서 제기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가 잘 아는 정철이 있다. 풍수적으로 뛰어난 이곳은 왕실의 묘역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곳이 왕실 무덤이라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왕실 무덤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 뛰어난 풍수 때문에 수호만을 하였다.
조선 중기에 삼척이 아닌 황지 부근에 이양무의 무덤이 있다는 또 다른 주장이 계속 나타나자 조정에서는 그 실체를 파악하고자 수차례 답사와 발굴을 했지만 무덤의 신원을 밝힐 수 없었다. 그후 삼척 두 무덤이 조정으로부터 왕실묘로 인정받게 된 것은 대한제국이 성립된 후인 1900년(광무 4)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사안으로 다음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이를 왕실묘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초기부터 이양무의 무덤 삼척에 있다는 소문이 그 지역에 퍼져있었지만 피장자를 확인할 수 없었던 조정에서는 수호하지만 왕실묘로 공인하지 않았다. 이는 지적(知的) 정직성이다.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태도는 이데올로기로 경화되지 않는 기본적인 태도이다. 관찰사 또는 전주이씨, 그리고 그 지역 이해관계자들이 계속 해서 왕실묘라고 주장했지만 조선시대 끝까지 이를 수용하지 않은 것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 깊은 일이다.
둘째, 주인을 알 수 없는 고총(古冢)의 신원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꿈’과 ‘풍수설’이 등장하고 있었다. 특히 고총의 위치에 대한 풍수적 해석은 무덤의 피장자 신원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면서도 신원을 확인하는 데에 중요한 증거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총의 신원이 파악되지 않자 묘비(墓碑)가 누군가에게 훼손 또는 은닉되었다는 소문이 널리 유포되는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셋째, 조선후기로 갈수록 왕실 묘역을 찾는 주체가 관찰사나 강원도 주민에서 전주 이씨가의 사람들로 변모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조선후기 사회 전반에 확산된 종족(宗族)과 가문(家門) 의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대한제국기에 준경묘와 영경묘는 제왕가(帝王家)의 역사를 나타내는 기념물이었다. 이 무덤은 불확실한 태조 선조의 삼척 이주설(移住說)을 구체화시키는 자료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황실가(皇室家)는 조선의 건국 이전보다 더 오래 전부터 황위(皇位)를 위해 준비하였다는 것을 묘역의 풍수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욱, <조선시대 왕실 원조의 무덤 찾기-준경묘와 영경묘를 중심으로->, <<종교연구>>60,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