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제사/진전

전주와 경기전(慶基殿)

갈뫼길 2014. 6. 5. 01:46

 

 

경기전을 찾아 전주에 처음 갔을 때 나의 눈에 먼저 띤 것은 경기전이 아닌 전동성당이었다. 100여 년 전 단층의 기와집이 길게 늘어선 전주 시내에 30미터가 넘는 성당이 세워졌을 때에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서울의 명동 성당 역시 조선후기 대표적인 진전 중 하나였던 영희전永禧殿에 근접하여 세워졌다. 이국적이고 중세풍인 성당을 들어서면 예수와 마리아를 비롯한 여러 성인들의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는 상에도 자연스레 눈이 간다. 가톨릭이 중심이었던 중세 유럽 사회에서 인물을 표현한 초상화나 조각상은 너무나 쉽게 만날 수 있는 대상 중 하나이다. 반면 우리 전통 문화, 특히 조선시대 문화에서 인물화는 매우 제한적으로 생산되었다. 또한 초상화가 제향에서 사용되는 경우도 흔치 않았다. 이런 문화적 상황에서 태조의 어진 곧, 초상화를 봉안하고 있는 경기전은 다른 곳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우리 문화의 새로운 모습을 간직한 곳이다.

경기전은 태조의 어진을 봉안한 전각으로 1410(태종 10)에 건립되었다. 건립 당시엔 어용전御容殿이라 하였다가 1412(태종 12)태조진전太祖眞殿으로 고쳐 불렀으며, 1442(세종 24)에 비로소 경기전慶基殿이란 전호殿號가 주어졌다. 조선전기 태조의 진전은 전주 외에도 영흥, 경주, 평양, 개성 등지에 건립되었다. 이러한 지역에 전각을 지어 태조의 어진을 모신 까닭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왕실의 발상지發祥地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진전 중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영흥의 준원전濬源殿은 환조의 옛 집터이자 태조의 탄강지였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외방에 대한 통치 방식의 일환이었다. 집경전集慶殿과 영숭전永崇殿은 옛 왕조의 흔적이 깊게 남아있는 경주와 평양에 각각 세워진 진전인데 새 왕조의 위엄을 알리고 반란의 기운을 미연에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개국 직후 전주는 태조의 본향이라 하여 완산유수부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393(태조 2)에는 왕실의 연고지라 할 수 있는 화령(영흥), 안변, 그리고 완산(전주)의 성황신을 계국백啓國伯으로 봉하였다. 이런 과정을 염두에 둘 때 전주의 경기전은 왕실 발상지에 대한 표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경기전은 다른 진전과 달리 중앙 정부나 왕실에서 건립을 주도한 것이 아니라 전주 부민府民들에 요청에 의해 건립되었다. 전주에서 태조 어진의 봉안을 중앙에 요청하자 중앙에서 경주에 있는 태조 어진을 서울로 모셔와 모사본을 만들어 전주에 봉안토록 하였다. 전주를 본관으로 한 왕조의 개창은 배반의 땅으로 간주되었던 금강 이남 지역에게 새로운 희망이었으며 이러한 희망은 전주에 건립된 태조 진전을 통해 구체화시킬 수 있었다.

어진을 통해 권위를 표출하고 제향을 거행하는 진전은 고려시대 전통을 반영한 것이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인하여 조상과 다양한 신을 섬기는 데에 화상畵像 또는 소상塑像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왕실의 경우만 보더라도 선왕의 어진을 모신 경령전慶靈殿이 별도로 있어서 종묘만큼이나 중시되었고, 봉은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에서도 선왕의 어진을 모셨다. 조선 초기 왕실의 원묘原廟로 세워졌던 문소전文昭殿 역시 이러한 고려시대의 영향을 받아 애초 진전으로 건립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국가 체계가 정비되어감에 따라 점차로 선왕을 비롯한 국가 제사에서 화상과 소상은 신주로 대체되었다. 신유학자들은 터럭 하나라도 같지 않으면 곧 다른 사람(一毫不似 便是他人)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고려시대 유행하였던 초상화를 배척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세종대 이후 어진을 모신 진전의 건립은 위축되었고 기존에 세워진 지방의 진전만이 중앙의 통제 속에서 유지되었다.

경기전의 역사는 그곳에 봉안된 어진의 역사이다. 경기전의 어진은 조선후기 많은 병란과 재화災禍에서도 온전히 보존된 몇 안되는 왕의 초상이다. 임난 때에는 병화를 피해 정읍, 강화, 영변 등지로 옮겨 보관되었다가 돌아왔다. 1767년 전주성내 큰 화재 때에도 명륜당으로 옮겨 화를 모면하였다. 전란 속에서 무사하였던 경기전 어진은 1688(숙종 14) 남별전(영희전)에 봉안한 태조 어진의 모본이 되었으며, 1742(영조 18)에는 한차례 대대적인 보수가 있었다. 그리고 1763년에는 오래되어 채색이 희미해진 태조 어진을 한양으로 모셔와 모사한 후 구본舊本은 백자 항아리에 담아 경기전 북쪽에 묻고 새 본을 봉안하여 현재까지 전한다. 비록 조선 초기본이 존재하지 않지만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통해서 어진의 제작과 관리 및 보수, 그리고 그 생명이 다함에 따른 이모移貌의 과정을 온전하게 볼 수 있다.

경기전은 어진을 보관하는 장소일 뿐 아니라 어진을 매개로 한 의례 공간이다. 경기전은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정전 가운데 칸을 침실寢室로 꾸몄다. 위 천장에는 당가唐家를 두었고 뒤에는 일월 모양이 그려진 병풍을 둘렀으며 앞면에는 초록에 무늬가 있는 비단 휘장을 늘어뜨리고 휘장 밖에는 다시 발을 늘어뜨린다. 어진은 이렇게 꾸민 방에 감지 않고 펴서 봉안하였다. 어진이 벌레나 습기에 상하지 않도록 온돌을 깔아 불을 지피고 방안에 향 주머니를 두었다. 발을 걷고 휘장을 열면 의자에 앉은 태조의 모습이 위엄있게 나타난다. 매달 5일 간격으로 어진을 봉심하였으며, 삭망일에 분향하고 정조,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납일에 제향을 올렸다. 이런 제향을 위해 경기전 정전 주변에는 전사청典祀廳, 재실齋室, 주방酒房, 조병청造餠廳, 제기고祭器庫 등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

조선후기에 전주는 풍패지향豊沛之鄕의 지위가 더욱 강조되었다. 조선전기 왕실의 풍패지향은 목조로부터 태조까지 삶의 터전이었던 함흥과 영흥이었다. 전주 역시 조선초기부터 풍패지향으로 간주되었지만 건국 당시 태조에게 실제적 고향이라기보다 가계도를 통해 찾아가는 관념적 고향이었다. 그러나 숙종대 이후 왕실의 연원과 선왕의 치적을 표상화함으로써 왕권을 높이려는 국왕들은 전주와 어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숙종대 영희전을 지어 태조 어진을 모사할 때 경기전의 어진을 모본으로 하였다. 그리고 영조대에는 경기전 뒤편에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의 사당인 조경묘가 세워졌다. 조선을 개국한 지 8회갑이 되는 1872년에 고종은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모사하여 새로 봉안하였고 이때에 본인의 어진도 제작하였다. 일정한 장소에 어진을 봉안하여 제향을 거행하는 것이 진전의 본래 기능이며 진전을 비우는 것은 재변을 피한 급박한 조치였다. 그러나 수리와 모본의 제작을 위해서 한양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과정은 이모 작업 만큼이나 중요한 이벤트이며 의례였다. 그것은 태평의 시대를 암시하는 것이며,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는 것이고, 국왕에 대한 관민의 충성을 표출하는 과정이었다.

경기전 어진 속 태조의 모습이 실제의 태조와 얼마나 닮았을까? 사진만큼이나 사실적이지 않지만 상상의 그림이 아닌 초상화이기에 실제와 일정 정도 유사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진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실제와의 닮음이 아니다. 오히려 새왕조의 개창으로 실현하려한 왕도 정치의 이상이 절제되고 안정된 화폭에 담겨 있기에, 그리고 당대 가장 성스러운 물건 중 하나인 어진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과정 속에서 조선시대 정치와 문화를 엿볼 수 있으므로 경기전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