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5일 근무와 종교
주 5일 근무제와 종교생활
이 욱
1.
한 해의 달력을 받으면 빨간 날의 수부터 센다. 가지런하게 놓여있는 일요일의 빨간색도 좋지만 검은 색이 있어야 할 자리에 찍힌 빨간색에 우리는 미소를 지으며, 둘 이상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면 더 이상 좋을 게 없다. 인간을 시간의 주인이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에 놀아나고 있다. 검은색, 파랑색, 그리고 빨간색이 마련한 그 틀 안에서 우리의 삶을 꾸미고 있다. 그런데 이 정해진 글자의 배열에 빨간색이 두 줄을 차지한다면 어떨까?
주5일 근무제! 일자리 없는 백수에겐 허망한 이야기이지만 근자에 매스컴에서 자주 흘러나오는 용어 중 하나이다. 직장에 목매달고 사는 많은 사람에게 토요일은 나오지 말라는 소리는 영원히 나오지 말라는 소리로 들려 마음 편히 집에서 쉬기 어려울 것이다. 어렵사리 꾸려가는 중소기업 중에서 토요일까지 노동자를 놀릴 회사는 몇이나 될까? 이러한 걱정과 현실의 무게감 속에서도 우리 사회는 일주일에 5일만 근무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움직인다. 물론 작년에 노사정위원회가 합의한 사항이지만 현재까지도 그 시행을 두고 논란이 많다. 왜 그런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선 시간이 돈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법정노동시간은 주 44시간이다. 물론 실제적인 노동시간은 이보다 훨씬 많은 51시간 정도이다. 법에서만 존재하는 별볼일 없는 것이라 치부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 법정시간은 현실의 시간을 규제한다. 물론 법적인 이야기지만, 이 법정시간을 넘어선 노동에 대해선 평소 임금의 50%에 해당하는 초과노동수당을 지급해야 되기 때문이다. 만약 주5일 근무제를 시행한다면 우리의 법정노동시간은 주 40시간으로 줄어든다. 그러므로, 현재와 같은 노동시간을 유지하려면 경영자는 4시간에 대한 초과노동수당을 지급해야된다. 경영자측에서 주5일 근무제를 반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월차, 생리휴가 폐지, 초과노동수당 할증률 인하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주5일 근무제로 인한 손실을 막으려고 하고 있으며, 이로 인한 노사간의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주5일 근무제의 목표가 저임금, 중노동, 장시간에 시달려온 우리 노동현실을 개혁하여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2.
이러한 현실적 문제로 긴장된 정국을 맞이하는 노동의 현장과 동떨어져 있으면서도 이 주 5일 근무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곳이 있다. 빨간색 날의 주인 노릇을 해왔던 종교계가 그것이다. 일요일을 주일(主日, the day of Lord)이라 부르며 성경책을 들고 교회로 총총히 가는 기독교인. 그들에게 이 날은 검정고시도 치를 수 없는, 오직 교회에 가야되는 그들만의 날이다. 현대 생활을 규정짓는 주 7일의 주기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영향 때문임을 부인할 순 없다.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고 7일째 되는 날에 쉬었다는 바이블의 천치창조 신화는 제 7일째 되는 날을 안식하면서 창조주를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안식일은 일주일의 7일 중 가장 마지막에 있는 토요일이다. 유대교식으로 하면 금요일 해질 때부터 시작하여 토요일 해지기 전까지의 시간이다. 7일을 주기로 하면서도 일요일이 성스러운 날로 자리잡게 된 것은 예수와 직접 관련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일요일에 부활하였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날을 예배일로 정했다. 이 일요일이 유럽사회에서 공식적으로 휴일로 정해진 것은 기원후 321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서이다. “모든 재판관들과 시민들과 장인들은 존경스러운 태양의 날에 쉬어야 한다.” 이 칙령에서 알 수 있듯이 유럽사회에서 일요일이 휴일로 되는 것은 이를 주의 날로 여겼던 기독교의 영향만이 아니라 당시 로마사회에 만연하였던 태양신에 대한 신앙 때문이었다. 물론 중세 사회에서 점차 일요일은 태양신의 그늘에서 벗어나 기독교의 주의 날로 확정되어 갔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주 7일의 주기는 우리 전통적 시간관에서 볼 때 낯선 것이었다. 실제 우리가 이 주기법을 사용한 지는 이제 100년이 겨우 넘었을 뿐이다. 우리가 날을 계수하던 전통적인 방법은 간지(干支)와 삭망(朔望)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의례일도 삭망의 분향 이외엔 세시력의 틀에 들어가거나 기일에 맞추어져 있었다. 서양의 시간 주기인 7일을 단위로 하여 6일 동안 일하고 하루를 쉬는 방식을 취한 최초의 한국인들은, 조선후기 천주교 신앙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던 사대부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음력에다 7일의 주기를 끼워맞춘 불완전한 것이었다. 이후 1876년 개항 이후 개항장에서나 선교사들이 운영한 신식학교에서 부분적으로 사용되다가, 갑오개혁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1895년 윤5월 12일에 정부는 요일제 도입을 포함한 관청근무시간을 “일요일은 전일휴가하고, 토요일은 정오12시부터 휴가를 한다”로 규정하여 새로운 주기법을 도입하였던 것이다. 이후 주 7일의 주기는 우리 근대의 기본적인 시간의 주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노동만이 아니라 휴식, 그리고 종교생활의 주기 역시 이 틀에서 운영되지 않을 수 없었다.
3.
주5일 근무는 기존의 일요일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요일에 가장 많은 인구를 유동시키고 있는 기독교는 주5일 근무제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일부 기독교 목회자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일요일에 여가를 즐기기 위해 도시를 벗어나는 일이 잦아질 것이며, 이로 인해 일요일에 교회를 비롯한 종교시설에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직장과 집, 학교와 집을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던 생활, 일요일엔 결혼식 잔치도 귀찮고 오직 잠만 자던 생활에서 적극적인 여가생활로 바뀔 것이다. 그리하여 억압된 도심 가운데 그 나마 휴식처가 되었던 교회나 포교당은 그 빛을 잃을 것이다. 자가용을 타고 잠시만 나가면 맑은 공기가 있고, 즐거운 놀이가 있고, 반가운 사람이 있는데 교회와 도심포교당을 애써 찾을까?
이러한 우려 속에서 주 5일 근무제를 볼 때 세 가지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주5일 근무제가 제공하는 주2일 휴가제는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적극적인 여가선용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집안에서 잠으로 대신하던 휴식문화가 집밖에서의 적극적인 레저활동으로 변할 것이다. 임금 상승이라는 부정적인 견해 속에서도 주5일 근무제가 우리 산업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것이라는 전망은 이 레저산업의 발달과 연관되어 나오는 것이다. 수동적인 휴식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맞는 여가생활을 찾을 것이기 때문에 다양한 레저문화가 펼쳐질 것이다. 둘째, 주2일 휴가의 담지자로서 가족이 부각된다. 사랑이란 같이 있음으로 인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품안의 자식이라고 애들도 좀 자라면 컴퓨터 오락한다, 친구와 만난다 하여 얼굴 보기가 어렵다. 더욱이 주 51시간의 노동 후에 일요일을 맞이하는 가장은 이불 속을 나오지 않는다. 맞벌이 부부일 때 같이 ‘살고 있음’을 느낄 기회는 더욱 더 없다. 주 5일 근무제는 이렇게 직장과 학교에 분산된 가족들을 집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가업을 이어 같이 연장을 만지거나 논밭에서 같이 땀흘리며 땅을 가는 것도 아닌 현대의 가족들은 일이 아니라 휴식을 매개로 모인 여가공동체이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전수할 수 있는 것은 놀이 밖에 없으며, 땀을 같이 흘리는 기회도 이것 밖에 없다. 그러므로 애들에게 가장 좋은 아빠는 잘 놀아주는 아빠이다. 사랑받는 남편은 유머있고 부드러운 남자이다. 물론 그보다 더 좋은 것은 돈을 잘 벌어주는 아빠이겠지만, 연봉 얼마짜리 인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현실적인 방법은 직장에서 얻은 4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세째, 이 적극적인 여가선용에 의해 기존의 신도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종교계는 이제 레저문화와 대결해야 한다. 기성종교는 지배권력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지만, 그래도 종교가 사회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피난처이고 치유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락방 같고 허름한 곳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자를 찾아 몰려왔다. 그러나 가난이라는 것이 누더기 같이 느껴지고 돈을 조금 내더라도 서비스 좋고 깔끔한 것을 선호하는 미감(美感)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소수를 위한 향략적 문화라면 거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소시민들이 자신의 삶을 살찌우고자 하는 레저문화의 평등화에 거부할 명분은 없다. 주5일 근무제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이 매우 부정적인데 비해 불교는 호의적이다. 아직까지 도심보다 산을 끼고 있는 사찰이 많기 때문이다. 곳곳에 산이 있는 우리네 땅. 그 산속에 사찰이 없는 곳이 몇 군데나 될까? 교회와 같이 부흥회 전단지를 뿌리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사람들이 몰려온다니 이 얼마나 잘 된 일인가! 그러나 주5일 근무제가 교회에 가던 사람의 발길을 사찰로 돌리게 만들 수 있을까? 산을 찾는 사람이 사찰에 머물까? 불교 역시 레저산업과 대결해야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4.
종교와 레저가 공존할 수 있을까? 현실의 일상성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둘은 근무가 없는 이틀의 휴일에 자리를 같이 한다. 그러나 경마장 가는 길과 산사를 찾는 길은 다를 것이다. 레저의 기쁨은 현재적이며, 그 자체로 목적을 가진다. 레저가 긴장의 해소에 따른 건강, 친교의 확산 등을 위한 것일 수도 있으나, 이러한 기대효과 때문에 놀이가 즐거운 것은 아니다. 레저는 자기 구조 안에 기쁨을 간직하고 있어야만 사람을 모을 수 있다. 반면 종교는 현장의 기쁨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것을 향해 열려있다. 그리고 그 기쁨을 누리는 전제로서 고통의 현실이 자리잡고 있다. 종교와 레저의 공존은 종교와 웃음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라는 물음이기도 하다. 고해의 바다를 웃음의 바다로 바꿀 수 있을까? 죄악의 세상을 웃음으로 바꿀 수 있을까?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는 격언과 같이 인생에서 웃음은 잠시이고 슬픔은 삶의 본질을 사색토록 한다. 눈물의 세계를 만들고자 하진 않지만 비애의 자각 없이 종교적 자각이 싹틀 수 있을까? 눈물나는 아픔이 없는 곳에 진정한 종교의 성취가 있을 수 있을까? 소비의 시대가 주는 선문답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종교로 하여금 레저를 끌어안기를 바란다. 마치 미술관 옆 동물원과 같이 서로 이웃하기를 바란다. 이는 사찰 옆에 놀이기구를 만들고, 볼링장을 만들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이것은 사찰이 현재의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레저가 갖지 못하는 기쁨, 곧 자신의 발견과 지혜의 획득에서 오는 기쁨을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실제 한국의 기존 종교계는 미래적 기쁨에 지극히 의존하였다. 천국을 위한 것이든, 공덕을 쌓기 위한 것이든 예비의 시간(the time of preparing)이었으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금욕과 절제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치유를 위해, 자식을 위해, 입시를 위해, 진급을 위해 비는 시간(the time of praying)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을 담당했던 중심 인물은 듣기만 해도 가슴 뭉클한 어머니였다. 어느 종교나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이 과대해온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제 어머니의 기도가 종교의 자리를 채우는 것이 아니다. 직장을 찾아 떠난 어머니의 자리는 젊은이와 남자들이 함께 채워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족이 함께 오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이 자리는 예비의 시간도 비는 시간도 아닌 같이 현재의 기쁨을 공유하는 시간으로 바뀌어야 한다.
또 한편 주2일의 휴일제를 맞이하는 데에 종교계가 해야 할 일은 주2일 휴가에서 소외된 자를 감싸는 것이다. 주5일제가 꿈꾸는 사회는 장시간, 저임금 노동 속에 소외된 삶에서 해방되어 인간다운 삶, 인간을 위한 노동을 즐기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기대치에 다가설 수 있는 부류는 아직 많지 않다. 주2일의 여가를 즐기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어쩌면 이 날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본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 주2일을 반납해야 할 경우가 더 많을 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 소외받는 것은 토요일 문을 닫을 학교 앞에서 머뭇거리는 청소년일 것이다. 한편, 세 쌍에 한 쌍꼴로 이혼을 하는 지금 이 휴일을 공유할 수 있는 가족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것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 레저는 기쁨을 원하지만 우리 삶에 아픔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방식만 달리 할 뿐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이 아픔들을 치유할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참여불교>> 게재)